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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길

삼남길 경기1길 한양관문길 - 남태령에서 인덕원까지

아직 계절은 초여름 유월인데 기온은 30도를 넘어서 중복의 여름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칭하는 하나의 종이 지구의 온난화를 가속시킨다. 지구가 어떻게 아픈 신호를 보내야 사람들이 환경보호에 관심을 가질까?

이렇게 무덥고 습한 날 우리는 길을 걸었다.  


경기 삼남길의 시작인 남태령부터.


조선영조시대에는 서울과 의주, 서울과 경흥, 서울과 동래, 서울과 제주, 서울과 평해, 서울과 강화로 가는 6대대로가 있었다. 그 중에서 한양과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지방이었던 1,000리에 달하는 긴 길을 삼남대로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이 길을 통하여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이 걸었고, 이순신 장군이 게급장을 떼고 백의종군하기 위해 걸었고, 선비들이 유배를 떠났던 가기도 했다.

그 중에서 경기삼남길은 정조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기 위해 현릉원으로 가던 길이며, 선비들이 유배를 떠났던 길이기도 하다.

남태령표지석

지하철 4호선 남태령역 2번 출구를 나와 남쪽 방향으로 걸어오면 남태령표석이 있다. 남태령은 오래 전부터 서울과 수원을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지만 옛날에는 한 두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18세기말 정조가 수원화성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지나면서 잠시 쉬어가게 되었다. 정조는 과천관아 이방에게 이 길의 이름을 물었고, 이곳의 이름이 '여우고개'라고 할 수 없어 둘러 된 것이 지금까지 남태령이라고 불린다는 설이 있다.

용마골

남태령 표석에서 대로 안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가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면 용마골에 접어든다. 나무 그늘을 지나 조금만 태양 볕 아래 서게 되면 땀이 비 오듯 내린다.

용마골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관악산에 진입하는 산길이 나온다. 바짝 마른 계곡을 따라 오르고 또 오르면 왼쪽으로 삼남길로 접어드는 산길이 나온다.

관문체육공원

작은 동산의 고개를 넘으면 관문 체육공원이 보인다.

온온사

삼남길이라고 표시된 팻말을 따라 길을 걷다 보면 온온사가 나온다.
온온사는 조선 제22대 정조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릉원에 가는 길에 머물렀던 곳으로 온온사라는 이름은 정조가 이곳에서 매우 편안하게 쉬어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현판의 글씨는 정조가 직접 썼다.

온온사는 원래 과천현의 관아지였다. 정조가 현릉원 참배를 갈 때 딱 중간지점이었던 이곳은 지친 심신을 달래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역대 과천현감비석군

온온사 입구에는 역대 현감 비석군이 나온다. 이 비석군은 본래 과천면 관문리에 있던 비석을 이곳에 옮겨 놓은 것이다. 과천에 부임해 온 모든 현감들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이런 송덕비를 세워 줄만큼 공덕을 베풀었을까?

수령 600년 은행나무

수령이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는 그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과천향교

온온사를 지나 관악산 입구 쪽으로 걷다 보면 과천향교가 나온다.  과천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세운 조선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이다.  조선태조 때 처음 세워졌는데, 창건 후 1400년에 소실되어 1407년에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불에 타 다시 세웠다가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숙종 16년에 이 곳으로 옮겼다.

관악산계곡

이 계곡을 따라 관악산 꼭대기에 오르면 연주대가 나온다.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은 셋째인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관악산에 머물렀다. 두 왕자는 늘 관악산에서 한양을 바라 보았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 때부터 관악산 꼭대기를 군주를 그린다는 의미로 연주대(戀主臺)라고 불렀다.

과천정부청사

과천청사는 1975년에 건립계획이 세워졌고 1979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982년부터 경제부처의 입주가 시작되었다. 당시 과천은 허허벌판이었다. 필자가 1985년도에 과천을 방문했을 때 수많은 아파트가 지어졌으나 사람들의 입주가 안되어 마치 유령도시 같았다. 그런 과천이 정부청사가 들어서자 강남과 버금가는 인기도시가 되었다.

수자원공사 한강유역본부
줄타기의 본향 과천
가자우물

일명 찬우물이라고 불리는 가자우물이 있다.
이곳은 정조가 능행을 가던 중 이 부근에서 갈증을 느끼자 한 선비가 이 우물에서 물을 떠다 바쳤다고 한다, 물을 마신 정조는 물맛이 유난히 좋다고 하여 이 우물을 당상의 품계를 내렸다. 그 때부터 이 무물을 '가자우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또 물맛이 좋다고 하여 찬우물 이라고도 불렀다.

과천지식정보타운

과천에는 ‘과천지식정보타운’이란 이름으로 아직도 건설이 한창이다. 그곳이 시끄러운 10차선 대로 변이건, 비행기 항로길이건, 지하철이 멀건, 주변에 편의시설이 없건 상관없이 과천이란 이름만 붙으면 투기꾼들이 벌떼처럼 달려든다. 생산성이 전혀 없는 아파트 투기가 과연 우리의 미래의 성장에 발목은 잡지 않을까?

관양동 청동기 유적

삼남길 표시도 없는 길을 걸어 네비게이션을 따라 안양시 관양동에 접어 들었다.
길 옆에 작은 언덕에 오르자 관양동 청동기유적이 보인다. 이곳은 1999년 지표조사를 통해 처음 알려졌고 발굴 조사결과 청동기시대 잠자리, 민무늬 토기와 간돌칼, 갈판 및 갈돌, 가락바퀴 등이 출토되었다.

인덕원 옛터

드디어 종점인 인덕원 옛터의 표지석에 도착했다.
인덕원은 의왕시·안양시·과천시의 분기점으로 교통의 요지다. 인덕원(仁德院)은 조선시대 내시들이 은퇴한 후 이곳으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며 살았다는 의미로 인덕(仁德)이라 칭했다가 여행자들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원(院)을 설치하면서부터 인덕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인덕원역

무더운 날씨에 길을 걸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곳곳마다 새겨져 있는 옛사람들의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개발에 밀려 유적들은 하나 둘 훼손되고 다른 장소로 옮겨진다. 그러다 보면 볼거리는 하나 둘 사라지고 환경은 더욱더 피폐해 진다. 이제는 개발보다는 보호에 더 치중할 때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기후변화가 그 경종을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