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는 8의 긍정적인 의미를 담아서 수원 곳곳을 연결하여 수원의 역사, 문화,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거리를 만들었다. 그 첫번째 길인 1색 모수길을 소개한다.
며칠 전에 태풍이 불었다. 그 태풍에 실려 남부지방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산사태가 나서 가옥이 파묻히고 온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물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가 없다. 우리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지구에 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물길의 근원이다 하여 생긴 지명이 있다. 백제시대부터 모수국이라 불렸던 경기도의 도청 소재지가 있는 수원이다. 그 수원의 대표 하천인 서호천과 수원천을 따라 길을 걷는다. 그 길의 이름은 수원 팔색길의 1색 모수길이다.
모수길은 경기도인재개발원, 광교산, 광교저수지 수변산책로, 광교공원, 화홍문 , 수원천, 서호공원, 서호천을 거쳐 다시 경기도인재개발원으로 돌아오는 총 22.8 킬로미터로의 긴 코스다.
과거 우리나라 남쪽에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있었다. 그 삼한시내의 마한 54국 중에는 큰 물누리라는 뜻의 모수국(牟水國)이 있었다. 그 모수국이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지금의 수원 지역으로 추정된다. 모수길은 물의 도시 모수국의 하천 변을 여행하는 길이다.
이 코스는 너무 길고 힘이 들어서 시간적 여유를 두고 가야 한다.
순환되는 코스라 어디부터 시작해도 상관이 없으나 영동고속도로 북수원 IC를 나와서 경수대로 2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인재교육개발원에서 시작했다.
이곳은 경기도의 인재를 계발하는 경기도 인재개발원이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사물을 지각하고 인식하는 방법을 배우고 그것을 실생활에 응용하는 방법을 배운다.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배운다. 그러나 그 배움이 지속될수록 우리의 배움의 깊이는 깊어지지만 그 배움의 범위는 점점 좁아진다. 점점 전문화되어 가는 배움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학하다는 말 대신 전문가란 말을 더 선호한다. 그 결과 편견과 아집은 늘어나고 자신만의 편협 된 논리가 생겨난다. 그리고 그 생각에 따라 세상은 분열된다. 진정한 배움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인재란 무엇인가? 급증하는 지식의 홍수 속에 ‘배움과 변화 속에 나의 발전 나라발전’이라는 문구가 들어온다.
인재개발원 정문을 들어가서 모수길 팻말을 따라가면 광교산으로 진입하는 입구가 나온다. 광교산은 왕건(王建)이 이 산의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들을 위로하고 있을 때 산 정상에서 광채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는 "부처가 가르침을 내리는 산"이라 하여 '광교(光敎)'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전한다.
모수길을 가는 곳곳마다 갖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송죽동 거북바위에도 전설이 전해진다.
늙은 어미가 병에 걸리자 효자는 어미의 병의 효험이 있다는 거북이를 찾으러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구할 수 없었다. 그러자 웬 노인이 나타나 자신의 등에 효자의 이름을 적게 하고 거북이를 주었다. 효자가 그 거북이로 용봉탕을 끓여 먹이니 어머니의 병은 씻은듯이 나았다. 그리고 그 솥을 열어보니 거북이는 온데간데 없고 돌덩이만 남았다. 효자가 다시 그 노인이 있던 곳으로 가보니 노인은 간데없고 돌덩이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이 바위에 자신들의 이름을 쓰고 효험이 있기를 바랬으나 수풀은 죽고 그들에게는 오히려 불행한 일이 닥치기 시작했다. 효자는 이 말을 듣고 거북바위에 마을 사람들과 굿을 하고 훼손된 나무를 복원하자 액이 사라졌다. 그 후 사람들은 이 신성한 바위를 금 바위라 불렀다.
우성위보가 광교산에서 내려와 광교 수변산책로로 가는 근처에 있었다고 하는데 도시화로 인해 찾을 길이 없다.
옛날 백제 온조왕의 사위인 우성위라 불리는 사람이 이 마을에 살았다. 근처의 땅은 모두 그의 것이었고 사람들은 일대의 논과 밭을 우성위들이라고 불렀다. 지독한 가뭄이 든 어느 날 스님이 와서 시주를 하라고 했으나 지독한 구두쇠는 물조차 주지 않았다. 스님은 가면서 마장산 줄기의 가운데를 파서 광교천을 끌어오면 가뭄이 그친다고 했다. 우성위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공사를 시작했으나 지형이 워낙 높아 공사를 할 수 없었다. 실제 그곳은 마장산의 거문고혈에 해당되는 곳으로 혈의 중간을 끊으면 오히려 화를 끼치게 되는 것이었다. 30년 전만해도 흔적이 뚜렷하게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산 길을 내려오면 광교천과 수원천이 보인다. 물과 나무 그늘의 조화를 이룬 시원한 수변산책로를 따라 걷는 길에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수원천은 경기도 수원시의 북쪽 광교산에서 발원하여 광교저수지를 거쳐 영화동, 북수동, 팔달로, 매산로 등 수원의 구시가지를 관통한다. 발원지에서 광교저수지까지는 광교천으로 따로 부르며 여기서부터 수원천이다. 그 수원천에는 퉁소바위가 있다. 그 바위에도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옛날 광교산 아랫마을에 금술 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어 날이 갈수록 시름이 깊어갔다. 그러던 중 꿈 속에서 용왕이 나타나 수원천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는 연무동과 조원동 바위에 떨어져 올라 100일만 치정으로 기도를 하면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면서 꼭 퉁소를 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 후 남편은 연무동 바위에서 부인은 조원동 바위에서 매일 퉁소를 불며 100일 기도를 올렸다. 드디어 100일을 앞둔 새벽 용왕이 남편 꿈 속에 나타나 왜 퉁소를 불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느냐고 호통을 쳤다. 남편이 분명히 퉁소를 불었다고 고했으나 며칠 전부터 부인의 퉁소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대로 멈춰 바위가 되어버렸다고 역정을 내며 사라져버렸다. 남편이 놀라 한걸음에 아내에게 달려갔지만 병들어 죽은 아내를 발견하게 된다. 남편은 괴로움에 울부짖다가 부인 옆에서 쓰러져 죽고 만다. 그 때 바람이 불어 바위 틈으로 들어가 퉁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동안 남편이 들은 퉁소소리는 바로 바위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뒤 그 바위를 퉁소바위라고 불렀으며 아이로 태어날 운명을 갖고 있던 자라가 그대로 멈춰선 바위를 자라바위라 불렀다.
멀리 수원 화성이 보인다. 이 길은 수원화성의 방화수류정을 통과한다. 1794년(정조18년)에 시작하여 1796년(정조20년)에 끝난 화성축성에 필요한 석재들은 죽지산, 여기산, 권동의 5개 부석소에서 구했고, 대들보와 서까래 등으로 쓰일 나무들은 충남 안면도와 황해도 장산곶에서 남양만 구포나루를 통해 축성현장으로 운반했다. 또한 벽돌과 기와를 굽기 위해서 불을 땔 가마와 불을 지필 나무는 백운산에서 가져와 사용했다. 수원화성을 축성할 때 든 비용은 당시 국가의 재정을 휘청거리게 만들 정도의 거금이었다. 그래서 화성의 사대문 앞에 주막을 직접 운영하여 재원을 아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원래 이곳은 제법 깊은 연못이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매일 연못으로 놀러 오는 귀여운 한 소녀를 바라보는 재미를 낙으로 승천을 기다리며 수양을 쌓던 용이 살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용은 어느새 소녀들 짝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용과 소녀는 다른 존재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고 거기에다 용은 혼인을 앞두고 있었다. 용은 옥황상제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옥황상제는 인간이 되어 여인과 살든지 여인을 잊고 승천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그러나 용은 소녀를 위하여 승천을 택하면서 하루만 인간이 되어 소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한다. 옥황상제는 소원을 들어주며 소녀와 헤어진 후 다시는 소녀의 얼굴을 쳐다봐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소녀와 헤어진 후 드디어 승천하는 날 용은 그토록 연모했던 여인을 잊을 수가 없어서 여인이 사는 집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우연의 일치인지 여인도 용이 승천하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용은 가슴과 온몸이 굳어지며 그대로 땅에 말았다. 굳어진 용의 몸은 용연 옆에 떨어져 언덕이 되었고 머리는 바위가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은 용의 머리를 용두암, 용이 살던 연못을 용지 또는 용연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동시장은 100여 년 전 보부상들의 활동무대로 잘 알려졌다. 지금도 수원, 용인 등 인접지역 주민들이 즐겨 찾는 최대 식품매장 전문시장이다.
어린이가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대장간이라는 간판도 왠지 정감이 간다. 예전에는 아낙네들이 저렇게 널찍한 바위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빨래를 했다. 빨래 방망이를 힘차게 두둘기며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받은 설움을 달랬다. 불과 몇 십년전에 일이 이제는 아득한 전설이 되었다.
온통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경기 남부에서 이렇게 넓은 들판을 보기란 그리 흔치 않다, 이렇게 넓은 들판을 돈에 눈 먼 개발업자와 정부관리가 그대로 남겨 두는 것도 하나의 기적이다.
서호천이다. 서호의 수문 옆에 자리한 향미정은 1831년 화성유수 박기수가 건립한 것으로 향미정의 이름은 송나라의 대문호인 소식이 항주를 대표하는 절경인 소호가 월나라의 미인 서시의 눈썹처럼 아름답다고 말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축만제는 정조가 농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조한 인공저수지다. 축만제의 규모는 문헌상 제방의 길이가 1,246척(尺), 높이 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로 되어 있다. 서호는 원래 축만제(祝萬堤)라고 불리었으나 팔달산 기슭에 있는 읍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호(西湖)'라고도 불리었다.
서호천의 옛 명칭은 사근천(沙近川)으로 추정되며 수원시의 북쪽 파장동에서 발원하여 서호를 거쳐 장지동에서 황구지천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서호천의 이름은 서호저수지에서 따온 것이라 추정된다.
수원의 물길을 따라 걸어온 길이 다시 원점인 인재개발원으로 돌아왔다.
대한민국 온 도시가 개발 중이다. 여기도 재개발, 저기도 재개발. 자꾸만 옛 것이 사리지고 도시화되는 모습이 아쉽기만 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수원시가 사라지는 물길을 찾아 다시 복원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길고 길었던 여정에 힘이 들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하천의 백로와 오리, 다양한 수풀들, 그리고 그곳에서 자영과 어울어져 뛰노는 천진스런 아이들을 보고나니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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