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길의 세 번째 길은 쌍미륵길이다. 쌍미륵길은 파주 용미리에서 시작한다. 이 길은 조선시대 의주대로인 78번 도로를 따라 윤관장군묘와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을 지나간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는 작은 고을과 동산과 어우러진 논과 밭의 모습이 예전에 살던 고향집을 떠올리게 한다.
파주는 풍수지리적으로 뛰어난 고장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항상 주변의 환경을 바라보며 그 기운을 느끼며 자연을 닮아간다. 그런 이유로 옛 사람들은 자손의 번창과 길흉은 풍수에 있다고 믿었다. 산이 하얀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면 집안의 대가 끊기고, 산이 모가 나면 사람의 마음이 삐뚤어지고, 물은 서에서 동으로, 남에서 북으로 역류하면 마음도 역류한다고 믿었다.
파주의 산은 모두 흙산이다. 아무리 산을 깊게 파내려 가도 바위가 없다. 바위가 없기에 풀과 나무가 자라기 안성맞춤이다, 그 산을 끼고 흐르는 물은 언제나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그런 이유에서 일까? 파주에는 유난히 위인도 많고 묘도 많다.
장지산 기슭에는 용암사에는 바위에 새겨진 두개의 석불입상이 있다. 그 두 개의 석불 때문에 이 절을 쌍석불사라 부른다. 그 석불입상은 대략 1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석불입상은 높이 17.4m로, 천연암벽을 몸체로 삼아 그 위에 목과 머리, 갓을 따로 얹어놓은 불상이다. 원립모자를 쓴 부처는 남자, 방립모자를 쓴 부처는 여자로 전해진다.
고려시대 13대 선종은 세 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항상 근심에 사로잡힌 셋째부인 원신공주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사라졌다.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사는 사람들인데 매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
꿈에서 깬 궁주가 이상해서 왕께 고하자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 알아보니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두개가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 한산후가 탄생하였다고 한다.
그런 전설 때문에 이곳은 지금도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모친이 이곳 용암사 쌍미륵 석불에서 발원 기도하여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시절 이곳을 방문하여 함부통령, 미대사 등 각계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남북통일과 후손 잇기 사업으로 동자상과 7충 석탑을 세웠다.
지구촌 어디를 가나 종교시설이 있다. 농촌의 신록과 어울어진 사찰과 성당들의 다양한 종교시설들을 바라보는 것 자체로로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맘껏 느낄 수 있는 것이 더없이 행복하다.
뙤약볕에 한 농부가 논에 잡초를 뽑고 있다. 발 한 알마다 농부의 땀이 7근 들어있다는 일미칠근(一米七斤)의 말이 가슴에 닿는다..
공릉천의 시작점 공릉저수지 근처인 장곡리 마을을 지나서 참나리가 피어있는 마을길을 따라서 걷는다. 등에는 땀이 비오듯 쏟아지지만 자연의 푸르른 빛이 나의 마음의 지친 땀을 씻어준다.
고려의 문신인 윤관장군의 묘가 있다. 윤관은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주요요직을 거치고 1104년 추밀원사로서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가 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는 곧 별무반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1107년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한 후 그 곳에 9성을 쌓았다.
삶의 터전이 송두리채 없어진 동북 여진은 "동북 9성을 돌려준다면 자손 대대로 고려에 조공하고 기와 조각 하나도 고려로 던지지 않겠다"고 동북9성의 환부를 애걸했다. 조정은 어차피 지키기 어려운 동북9성을 다시 여진에게 돌려주고 동북아의 평화를 택했다. 이로 인하여 여진이 강성하여 송과 금을 공격하였을 때, 고려는 외세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송과 금, 여진을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국가의 번영과 평화에 기여하였다.
이처럼 고려는 조선과 달리 주변의 국가의 전혀 흔들리지 않는 자주적인 국가였다
조선의 선조는 왜란이 일어나자 백성과 왕궁을 버리고 피난 길에 오른다. 한 나라의 왕이 제대로 싸움 한번 못하고 쫓겨 달아나는 것은 나라의 치욕이요, 백성의 원망의 대상이었다. 이 길을 지나던 피난 일행은 갑작스러운 비 때문에 불을 피우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숨겨놓고 원망도 않고 아껴쓰던 숯을 가져온 덕에 비로소 불을 피워 젖을 옷을 말릴 수 있었다. 이를 본 선조는 이 숯은 처음 보는 탄이라 하여 그때부터 이 마을을 신탄(新炭) 또는 새술막으로 부르게 되었다.
의주길 3길 쌍미륵길의 종착지는 신산5리의 광탄 어린이집이다 .
우리의 조상들은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며 이 길을 오가며 무역을 하며 외교를 펼쳤다. 그 조상들이 오고갔던 그 길을 따라 걸어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미래의 후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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