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걷는다.
수원둘레길을 걷는다.
그 길의 두 번째 길인
수원여대입구에서 광교호수공원까지 걷는다.
2차원의 면을 이루는 1차원의 선으로 만들어진 수원둘레길의 경계를 따라 걷고 또 걷는다.
2차원을 걸을 때는 방향표시판을 잘 보아야 한다. 표시를 잘못 보면 방향을 놓쳐 방황을 하게 되고, 다른 2차원으로 들어가 영원히 그 길을 못 찾을 수 있다.
방향을 놓쳤을 때 길을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나의 방법은 최종 목적지 방향을 나침반 삼아 정해지지 않는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길을 만나게 되고 다시 그 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또 다른 방법은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오는 길에 방향 판을 만나게 되고 그 지점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분석하고 다시 길을 걷는 것이다.
인생길도 이와 같다. 길이 잘못되었을 때 포기하지 않고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시점인 수원여대 입구는 오목천동이다. 오목천동의 유래는 이 지역의 흐르는 하천이 오목한 곳을 따라 흐르기 때문에 오목내 또는 오목천이라 불리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도로명 주소보다 왠지 이런 동 이름이 더 정감이 가는 것은 오직 나만의 감정일까?
수원둘레길의 경계는 황구지천으로 이어진다. 수원의 4대하천의 하나인 황구지천은 총 79.1km의 상당히 긴 하천이다. 안양 삼성산에서 발원하여 부곡 저수지와 왕송 저수지를 거쳐 흐르다가 당수동에서 오룡골천, 당수천이 유입되고, 일월저수지의 일월천과 합류한다. 이렇게 흘러간 천은 금곡동에서 금곡천, 호매실동에서 호매실천과 합류하고, 서남부 쪽으로 흘러 정자동에서 서호천과 합류한 후 대황교동에서 수원천과 원천천과 합류하여 황구지천을 형성한다. 이후 수원 경계를 벗어나 화성군 태안읍에서 삼미천과 합류하고, 화성군 보통리 저수지를 거쳐 흘러 내려온 갈천을 받아들인 후 화성군 양강면에서 천천과 최종 합류하여 진위천으로 명칭이 바뀌어 흘러간다.
황구지천의 이름은 평택의 황구지리에서 유래한 듯하다. 원래 황구지천은 항곶천(亢串川)으로도 불리었는데, 항곶천은 바다와 만나던 곳의 옛 지명 항곶진(亢串津), 현재 평택 서탄면 황구지리에서 비롯되었다. 이 항곶천이 변하여 황구지천으로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출처: 국토정보지리원)
황구지천의 뚝방길에는 길게 이어진 벛꽃길이 있다. 이 길은 1999년 3월 곳집말 주민들이 2~10년생 벛나무를 총 연장 4km에 달하는 길을 하천 양쪽에 조성한 길이다.
하천길은 다시 서호천으로 이어진다. 서호천은 총길이 11.5km의 하천으로 수원 북쪽 파장동에서 발원하여 서호를 거쳐 정자동에서 황구지천과 합류한다.
경계를 걷는 길은 중앙에서 가장 멀어진 길을 걷는 것이다. 중앙에서 멀어진 경계에는 사람들이 가까이하기 싫은 것이 있다. 그곳에는 시끄러운 소음을 발생하는 공군비행장이 위치하고 공군예비군훈련장이 있다.
서호천을 따라 가다 보면 옛 수인선 협궤 철로를 만날 수 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후 온갖 물자를 수탈하기 위해 수인선 철도를 건설했다. 한 사람이 겨우 서 있을 좁은 2 미터 남짓한 폭에 서로 마주보고 앉으면 무릎이 닿고, 크기가 작아 안산 원곡고개를 넘을 때면 시민들은 열차에서 내려 밀고 올라가야 했다고 한다. 1995년까지만 해도 저 철로 위를 달리는 협궤열차에서 소래포구로 가는 새우 젖 상인들에 틈에 끼어 남녀의 청춘들이 좁은 열차 양쪽으로 무릎을 맞대고 앉아 사랑을 나누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지금은 온데간데 없고 철로만이 홀로 수풀 속에 가려져 흔적만 남기고 있다.
수원둘레길과 삼남길이 겹치는 구간에 일행이 삼남길을 걷고 있다. 길과 길은 서로 교차된다. 둘레길은 삼남길을 만나고, 효행길을 만나고, 도란길을 만나고, 또 모수길을 만난다. 끝없이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길을 간다.
중고차매매시장에는 끝없이 중고차들이 적재되어 있다. 수만 년을 내려온 인류는 화석연료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자연과 더불어 생태계의 파괴 없이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백 년 남짓 되는 시기에 화석연료를 발견하고, 그 에너지를 이용하여 고속의 탈 것을 발명하게 된 다음부터 인류의 교류가 급격히 빨라졌다. 그로 인해 과학문명은 급속히 진보되고 그에 따라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결과 쓰레기는 넘쳐나고 지구는 오염되고 생태계는 급속도로 파괴되었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시멘트 매장량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새마을 운동이 성공했고 건설 붐이 일어났다. 비옥한 땅만 있으면 무조건 택지지구로 선정되고 수많은 아파트들이 생겨났다.
세류지하보도에는 흥부와 놀부 벽화가 있다. 자원이 부족한 좁은 국토에 끝없이 증가하는 인구는 내수만으로는 결코 잘 살 수 없었다. 결국 흥부와 놀부의 흥부는 덮어놓고 낳다가 거지꼴을 못 면하는 무능한자로 치부되고 어느새 금전만능주의 사회로 변하고 말았다.
조금 모자라게 벌더라도 인정이 넘치는 사회, 모두가 주어진 직분만 충실하면 어느 정도 행복이 보장된 사회가 될 수는 없을까?
화성 유수부 남쪽에는 대황교라는 표석이 있었다. 처음 이름은 소황교(小皇橋)였는데 정조 19년에 대황교로 고쳤다. 대황교는 왕이 건너 다니는 길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속국에서 어떻게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을 허락도 없이 사용할 수 있느냐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시절 상복차림으로 중국에 파견된 사신이 중국에 도착하니 마침 그 곳 대비가 죽어 상중이었다. 중국에서는 상복차림의 사신을 보고 그 선견지명에 놀라 대향교의 명칭에 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로 인해 다리이름은 그대로 대황교로 지속하게 되었다.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사이에 낀 우리나라는 강대국이었던 고구려를 제외하고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대외교를 해야만 했다. 지금이나 조선이나 외교관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할까?
곡반정동은 반정리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골반정이라고 한 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또 수원 유수가 이 곳을 지나다가 물을 마셨는데, 물이 매우 시원하였으므로 시원한 물이 있고 쉬어 갈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출처: 두산백과)
수원에는 축구선수 이름을 딴 박지성길이 있다. 박지성축구센터와 지성숲까지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그로 인해 그 사람이 빛나고 우리나라가 빛나고 또 우리가 만든 상품이 빛난다.
거리에 수많은 상점이 있다. 상점엔 주인이 있고 또 점원이 있다. 좁은 국토에 땅이 있는 곳마다 아파트가 있고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각각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떻게 살고 있는가?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소득이 있고 의식주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놀랍다. 그 동안 대한민국은 원료를 수입해서 가공해서 수출하여 돈을 벌었다. 가공무역이 배트남과 같은 개발도상국의 차지가 되자 반도체와 IT로 돈을 벌었다. 점점 세계 각국의 기술이 평준화되고 기계가 사람이 할 일을 대치하는 세상에서 미래의 세대는 어떤 직업을 영위하며 살까?
우리의 교육은 그 답을 알고 있을까?
둘레길은 다시 원천리천을 만난다. 과거 삼한시대 마한 54국 가운데 하나 ‘모수국(牟水國), 수원(水原) 그 물의 도시답게 길은 계속 하천을 만난다.
오늘은 수원시와 화성시의 경계를 걷고 수원시와 용인시의 경계를 걸었다. 수많은 하천과 하천도 만났다. 그래서 수원여대입구에서 이곳 신대저수지 광교호수 하늘공원까지 경계의 2/3를 걸었다. 이제 1/3만 남겨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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