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국가이념은 유교사상이다. 유교사상 중에서도 특히 부자, 군신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 국가의 구성원인 개인의 발전보다는 왕권의 강화를 더욱 공고히 만들었다. 그 결과 효는 가부장에 대한 무조건 복종을, 충은 군주에 대한 무조건 헌신을 요구했다. 가장 절친해야 할 부모와 자식, 정부와 백성의 관계를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변질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국민이 주인이라는 사고 방식이 지배함에 따라 과거의 봉건적 사고방식은 사라졌다. 이제 부모와 자식은 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친근한 사이로 바뀌었고, 국민은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고 국민의 판단으로 통치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민주주의 직접선거가 확고히 정착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수원둘레길에 이어 7색 효행길을 소개한다. 효행길은 정조가 봉건적 사고에 의해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아비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러 가는 길이다. 효행길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현릉원을 참배할 때 왕래하던 효행의 길로 정조의 지극한 효심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효행길의 시작은 효행공원에서 시작한다
효행공원은 대중교통 이용 시 4호선 사당역에서 777번, 1호선 명학역에서 65번을 타고 오면 된다
효행공원에는 프랑스군 참전기념비가 있다.
냉전시대 머나먼 이국에서 아까운 청춘과 목숨을 바친 그 영령들에게 잠시 머리를 숙이고 효행길을 간다.
효행공원은 정조가 사도세자가 묻힌 현릉원을 참배하며 다니던 지지대고개 옆으로 그의 효성을 추모하고 본받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그 효행공원 안에 정조의 동상과 효에 대한 문구가 적혀 있다.
효는 모든 행실의 근본이니라.
가엽게 돌아간 아버지의 넋을 달래고 영원한 복을 빌기 위하여 수천여 백여 길을 수없이 오고 갔던 정조임금의 효성 앞에 머리 숙이자.
그리고 우리 모두 그 효성을 본받아 실천에 옮길 것을 다짐하자.
조선시대의 대로 중 한양과 충청, 전라, 경상 삼남지방을 이었던 천리에 달하는 긴 길, 삼남대로를 정조도 이 길을 따라 갔다.
필로(蹕路)는 거동할 때 지나갈 때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임금의 수레가 지나가는 길이다. 정조는 지지대고개에서 현릉원에 이르는 필로에 18개의 표석과 11곳에 이정표와 장승을 세웠다.
괴목정교가 정조에 의하여 세워지기 전 이 곳에 통행세를 받는 사람이 있었다. 통행세를 받은 사람은 세 사람으로 이들은 이틀 걸러 하루씩 한 냥의 통행세를 받았다, 그래서 이곳을 한냥골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이렇게 거두어 모운 돈으로 당시 파장동에 살던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법화당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군의 행방을 쫒던 왜군들은 먼저 갈미(지금의 의왕시 내손동)에 있는 미륵에게 조선군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았으나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할 수없이 왜군은 조선군의 뒤를 쫒아 뱃골(지금의 파장동과 이목동)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법화당의 미륵불은 조선군이 간 곳을 알려주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된 조선의 군사들은 화가 나서 법화당 미륵의 목을 부러뜨렸고 갈미의 미륵은 그냥 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방치된 파장동의 미륵불은 6.25이후 지금의 사람들이 다시 맞추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몸의 일부는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다.
정조가 지나간 길은 유독 소나무가 많다, 특히 지지대고개 정상에서부터 옛 경수간 국도를 따라 노송이 생장하는 그 곳을 노송지대로 부른다. 노송지대는 정조가 생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의 식목관에게 내탕금 일천 량을 하사하여 이곳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하여 만들어졌다. 현재는 대부분 고사하였고 34주의 노송만이 보존되어 있다, 낙락장송이 울창한 이 자연경관은 정조의 효심과 사도세자의 슬픔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어 길손을 멈추게 하는 곳이다.
당시 이곳엔 많은 성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모든 성씨의 집안들은 번성하였지만 용씨만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 때 지나가던 노인이 그 모습을 보고 이곳에 저수지를 만들면 용이 승천하듯 가문이 번성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다 쓰러져가는 가세에 저수지를 만들 방법이 없어 한숨만 쉬던 중 나라에서 이곳에 저수지를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모든 가솔들을 이끌고 저수지 공사에 참여하였다. 이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용씨를 놀렸지만 열심히 저수지 공사를 하였고 저수지가 완성되자 정말 용씨 집안은 번성하고 다른 집안은 몰락하였다.
현재 이곳은 만석공원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편히 여가를 즐기는 쉼터가 되고 있다.
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장안이란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의 안녕을 의미한다. 장안문도 서울의 흥인지문과 마찬가지로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다.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13년) 건립되어 수원관아와 정조 능행차시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1994~96년(정조 18~20녀)에 증축되어 최종 완공되었다.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에 진입하는 문이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으로 팔달문도 서울의 흥인지문과 마찬가지로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다.
원래 이곳에 대황교라고 새긴 표석이 있었다.
처음 이름은 소황교(小皇橋)였는데 정조19년에 대황교로 고쳤다. 원래 이 다리는 수원천과 합류하는 원천리에 있었는데 당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그 옆에 큰 다리를 놓아 대황교는 쓸모 없게 되어 융릉 입구에 놓아 형태를 유지했다.
그런데 이 이름에 문제가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 온 사신른 중국에 속국이라고 생각한 조선이 어떻게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을 허락도 없이 사용할 수 있느냐고 트집을 잡았다. 그래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마침 중국의 대비가 상중이었다, 그 때 상복을 입고 들어가자 중국에서는 대황교에 대한 명칭을 묻지도 않았고 결국 그 이름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효행길의 안내표시는 여기서 끝이난다. 수원시의 경계라 더이상 표시할 수 없다는 안내만 있을뿐. 이것이 지방자치제의 문제다. 경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제 소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방치한다.
효행길의 끝은 융건릉인데 더이상 표시가 없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계속 길을 간다. 방향 표시가 없는 길을 지도의 방향만 보고 앞으로 간다.
황계교를 건너 황계남길을 거쳐 호산교를 지난다.
수원시와 달리 화성시는 보행자를 위한 도로가 없다. 차도 옆 작은 길로 위험한 차들을 피해서 간다.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때 염거화상에 의해 창건된 고찰이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새로 만들면서 이곳을 원찰로 삼아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담아다시 크게 지었다
정조는 다른 모든 업적은 백성들의 삶을 위해 헌신하였으나, 유독 이 절을 지으면서는 고달픈 백성들의 시주 8만 7천냥을 모아 아비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154칸의 절을 궁궐의 형태로 지었다.
융릉은 정조의 아비 사도세자와 부인 헌경왕후 홍씨를 합장한 무덤이다.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인 건릉도 이곳에 함께 있다. 정조는 이곳 아버지의 묘를 참배하기 위해 수도 없이 이곳을 왕래하였다. 정조와 관리들은 가마와 말 안장에 앉아 그나마 편히 오갔을 텐데 가마를 메고 험한 길을 오고 간 가마꾼의 고생이 눈에 어린다.
정조의 효심도 본받아야겠지만 조선들의 민초들의 힘든 생도 다시 한번 느껴보면서 20km의 긴 여정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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