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길의 네 번째 길은 파주고을길이다.
파주고을길은 옛 파주목의 중심이었던 파주읍을 지나는 숲길과 농로길이다. 이 길은 파주 신산5리 광탄어린이집에서 시작한다,
원래 파주고을길은 78번 국도를 따라 가야한다, 그러나 국도길의 자동차 매연을 마시며 가는 것보다 숲길을 따라 만들어진 길을 따라 걷는다.
들에는 달맞이 꽃과 둥는잎 유흥초가 생명의 씨앗을 만들기 위해 벌과 나비를 유혹하고, 무더운 여름날의 농부의 땀방울로 만들어진 황금 빛을 살짝 머금은 벼가 온 들판을 수놓는다.
문득 어린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을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월이 무수히 흐르고 나면 그 시절 시간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나는 어린시절의 내가 되어되어 동심의 마음으로 돌아가 저 개울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는 나를 상상해 본다.
그 상상 속 어린 나는 소달구지를 타고 작은 다리를 지나 마을길로 들어선다. 그 옛날 마을 논밭에서 반갑게 나를 보고 웃음 짓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그 당시 내가 살던 마을에도 이런 공장들이 있었다. 일명 새마을 공장, 그 새마을공장이 생겼을 때 동네 형들이 농사일을 거드는 동안 누나들은 공장에 취직하여 동생들의 학비를 보탰다. 그 새마을 공장들은 그 시절 돈벌이를 찾아 무작정 도시로 떠나는 농촌의 젊은 소녀들을 붙잡아두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마을 길가에 핀 해바라기는 꿈을 찾아 무작정 도시로 떠났던 시골의 젊은이들을 닮았다.
그옛날 차가 지나가면 흙먼지를 뒤집어 쓰던 시골의 오솔길은 이제 모두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 시간 간격으로 오는 버스 정류장에 빈 의자가 주인을 기다린다.
출판사 물류창고가 출판의 도시 파주를 떠올리게 한다. 음식점들과 카페끼지 있는 걸 보니 직원들이 꽤 있는 듯 하다.
목장의 소들도 보인다. 태어나서부터 한 번도 들판을 뛰어놀아 본적이 없는 저 목장 우리안의 젖소들이 처량하다, 저 소들을 보고 있노라면 들판을 뛰어놀아 본 적이 없고 작은 학원이라는 울타리 속에 갖혀 사는 요즘 아이들이 떠오른다. 자유의지를 빼앗긴 저 젖소와 요즘아이들은 어딘가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봉서산 오르는 길 아래쪽에는 파주향교가 있다. 원래 이 향교는 봉서산(鳳棲山) 구향교(舊鄕校) 마을에 있던 것을 1456년(세조 2)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고종7년(1870년)에 발생한 수해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파주향교는 태조7년(1398년)에 처음 지었다. 건물 배치는 교육기관을 담당하는 명륜당을 앞에 두고, 대성전을 뒤로 배치한 형식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책 등을 지원 받아 양반 자제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파주고을길은 봉서산을 통과하는 구간이다. 봉서산에는 봉황이 즐기며 노래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산 정상에는 두개의 우물이 있는데 하나는 장사가 먹었다는 장사우물이고, 다른 하나는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도 바닥이 닿지 않는다는 전대우물이다, 또한 산마루에는 장사가 가지고 놀았다는 공기바위가 남아있다.
경기북부의 군사요충지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장군이 행주대첩 이후 주둔했던 봉서산성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유래들이 얽힌 곳곳을 다 둘러보지 못하고 의주길 코스에 맞추어 길을 걷는다.
봉서산에 올라 전망대에서 지나온 길을 바라본다. 까마득히 멀리 바라 보이는 지나온 길. 그 길 위에 한발 한발 내디딘 그 과정들을 생각한다.
그 길가에 돌무덤이 보인다.
행보다는 불행이 많았고
웃음보다는 한이 많았던 우리민족.
그 한과 불행을 돌 하나에 담아 돌무덤에 던진다.
그것으로 더 이상의
불행은 없기를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봉서산 중턱에서
멀리 오늘의 종착지인
선유리가 보인다.
군사보호지역이라 영원히 개발되지 않을 줄 알았던 이곳이 이렇게 산업단지가 되었다.
산업단지가 되면서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많은 사람들이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 중의 일부는 그 일시적인 행운이 오히려 가족간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그러나 운 좋은 사람들은 그 보상비로 다시 농사를 짓기 위해 근처의 땅을 매입했고 그 땅도 다시 산업단지로 바뀌어 이중의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개발의 결과로 빈부의 격차는 더욱더 심해졌다.
문명이 진화하려면 어쩔 수 없이 성장을 해야 하지만 성장과 함께 분배도 역시 중요하다.
오늘의 목적지인 선유삼거리에 왔다. 무덥던 여름의 태양도 세월의 흐름에 고개를 숙였다.
이제 한 코스만 임진나루길만 가면 된다.
조만간 이곳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하고 길 건너편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문산역까지 가서 경의선 열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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