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길의 마지막 길은 임진나루길이다.
의주길은 어린시절 내가 살았던 고을을 지나는 길이며 철조망 너머의 염원을 담은 길이다.
아침일찍 경의선을 타고 문산역에서 22번 버스를 타고 선유리 시장에 내린다. 이곳이 임진나루길의 시작점이다,
한반도 끝단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북으로 끝없이 이어져 유라시아 대륙 끝까지 연결되어야 할 이 길이 아쉽게도 여기서 끝이 난다.
이 길 왼편에 '이세화 선생'의 묘로 가는 길이 있다. 이세화 선생은 조선 숙종때 인현왕후 폐비에 대한 소식을 듣고 반대소를 올렸다가 숙종에게 밤이 새도록 국문을 받은 문신이다. 그는 친국을 받으면 죽어 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성리학의 법도에 어긋난 조강지처를 버린 임금에 행실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영의정의 높은 관직까지 올랐으나 관직에서 떠난 즉시 시골로 돌아가 손수 농기구를 쥐고 몸소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여 살았다.
그 시대에 관점에서 보면 그는 충신이고 청백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시대를 지난 지금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한다. 과연 그는 충신일까? 아니면 하나의 당파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위한 숙종의 탕평책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공맹의 가르침만 생각하는 외골수 학자인가?
여름의 적당한 태양 빛과 태풍이 없었던 덕분에 논에는 황금 빛 벼가 가득하고 대추나무에는 대추가 가지가 휘어질 듯 주렁주렁 열렸다.
임진강이 굽어 보이는 화석정은 율곡 이이의 5대 조부가 1443년 세종25년에 지은 곳으로 율곡이 어린시절과 말년에 시를 짓던 곳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 국방을 책임지고 있던 이이가 왕 선조를 찾아가서 10만 군사를 길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자는 방안의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상소는 받아들이지 않자 율곡은 고향인 파주에 내려와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고 없어도 항상 이 화석정 정자에 기름을 바르면 후에 긴히 쓸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10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선조는 뒤를 쫓는 왜군을 피해 의주로 몽진을 한다. 그리고 한밤중에 이곳 임진강변에 다다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선조 일행은 도저히 강을 건널 수 없자, 기름을 바른 이 정자를 태워 불을 밝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불에 타서 없어진 화석정은 그후 후손에 의해 다시 세워졌으나 6·25 전쟁 때 다시 불에 타 버리고 1966년 파주 유림들이 다시 복원했다. 그 건물의 정면에는 대통령 박정희가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다.
'화석정시'라는 시비에 쓰여진 시는 율곡 이이가 8세 때 지은 시라고 한다. 그의 천재성이 돋보인다.
花石亭詩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임진강은 개발이 되지 않아 천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말 그대로 천연 박물관이다. 임진강의 아름다운 절경이 한 폭의 그림이다. 언젠가 꼭 임진강변 수변길을 따라가며 그 절경을 가슴에 담고 싶다. 그러나 임진강변 생태탐방로는 군사지역이라 혼자는 갈 수 없고 150명 이내 예약접수를 해야 갈 수 있다고 한다.
임진나루는 임진강의 대표적 나루로 관북과 관서의 분기점이자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의주대로의 주요 길목이었다. 아직도 나루터 마을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있다.
들꽃이외다.
들킬까 숨어 핀 꽃 아니외다.
꺾일까봐 가냘픈게 아니외다.
온갖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
낮게 핀 들꽃이외다.
때로는 외로운 연인들이 흘리고 간
밀어의 조각을 외우며
사랑을 받는 게 아니라 외치며
누구도 알아주는 게 싫어서 핀 들꽃이외다.
덜 크고 덜 아름다워도 깊은 하늘 향해
가슴을 벌리고 있나이다.
밤마다 자리 잃은 별들의 나누는
이야기 먹으며 핀 들꽃 이외다.
그리고 오래오래 피기 싫어 진실이 무언지
알지 못하고 질 들꽃이외다.
詩 - 장종국
나지막한 고개 하나를 넘는다. 고도계를 들여다보니 100m 정도뿐이 되지 않는다.
또 다시 황금 빛 벌판이 눈앞에 펼쳐진다.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는 드넓은 가을 들판을 바라다보면 확 트인 바다를 보는 것보다 더 가슴이 트여지고 편안해 진다. 잠시 넋을 놓고 가을 그 빛을 바라본다.
임진나루길 2/3 이상을 걷는 동안 버스정류장을 보았지만 한 번도 버스를 본 적이 없다.
어쩌다 버스를 보니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왠지 신기했다.
마정4리 마을 안내 판 옆에 지워진 4H클럽 표지판이 보인다.
4H는 두뇌(Head:知)·마음(Heart:德)·손(Hand:勞)·건강(Health:體)를 뜻하는 실천을 통하여 배운다는 취지 아래 설
립된 세계적인 청소년 단체다.
내가 어릴 적에는 마을에 4H 클럽이 있었고 마을의 초,중,고생은 모두 이 단체에 가입했다.
그리고 저녁마다 마을 공회당의 모여 마을의 발전방향에 대하여 토론하고 실제 행동에 옮겼다.
길가에 가로수를 심고 도랑을 치고, 농촌의 소득을 위하여 작은 회비를 모아 토끼 한 쌍을 사고, 1주일씩 돌아가며 그 토끼를 키웠던 기억이 난다.
길을 가는 중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몇 사람이 손을 잡아도 끝을 잡을 수 없는 몸통을 가진 나무의 수령은 1982년 보호수 지정 시 수령 460년이다.
세월이 무수히 바뀌고 수십 세대가 넘어가고 역사가 바뀌었지만, 저 느티나무는 일희일비하는 작은 인간을 바라보며
이곳에 묵묵히 서 있었다.
끊임없이 누군가와 경쟁하며 빼앗고 빼앗기는 생존경쟁에 시달리는 동물들에 비하면 나무는 한 수 위다.
가만히 한 곳에서 모든 것을 다 베풀면 벌이나 나비는 그 곳에 저절로 날아와 열매를 맺게 해주고 동물들은 그 곳에 거름을 제공한다.
마정 초등학교 교정이 보인다.
도시의 인조잔디 운동장에 우레탄 보도블록을 한 초등학교만 보다가 이런 황토색 운동장을 본다.
저기 학생들은 우레탄 화학물질에 문제가 되지 않고 인조 잔디에 미끄러져 화상을 입을 염려도 없다.
어릴 적 많이 보았던 전차 방호벽이다. 탱크가 남침하여 이곳을 지나가면 전차방호벽 위에 시설물을 굴러 뜨려 탱크를 박살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적이 다시 공격하기 위해 이 길을 복구할 동안의 시간도 벌 이중의 목적이 있다.
예전에는 이런 것이 모든 진입로에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치고 빠지는 현대전에서는 그리 쓸모가 없을 듯 하다.
이 길의 종착지인 임진각이 보인다. 임진강 낙시터 위로 철길이 지나갔을 듯한 교각이 서있고 그 뒤로 철길이 보인다.
1906년 4월 3일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연결된 경의선 철도는 경부선과 함께 일본, 한국, 만주, 중국등 동북아 대륙을 이어주는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경의선은 개통된 지 40년만 인 1945년 9월 11일 남북간 철도 운행이 중단되었다.
유라시아로 달려야할 기차는 이곳 철도 중단점에서 더이상 가지 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그러나
'철마는 달리고 싶다'
그날처럼 장단, 봉동, 개성, 평산, 사리원, 평양, 신의주를 지나 만주, 중국, 유럽... 대륙의 끝까지 달리고 싶다.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측과 북측 대표들 한 테이블에 앉았다. 당연히 있어야 할 남측 대표는 그곳에 없었다. 그리고 펜을 꺼내 휴전 협정서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3년 이상 끌어오던 한국전쟁은 이날 밤 10시 정각에 멈추었다. 그것은 종전이 아닌 휴전이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우리는 이 곳에서 더 이상 북으로 갈 수 없었다.
모든 길은 이 곳 임진각에서 끝이 난다.
이곳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온다. 두고 온 딸 아들, 두고 온 아내와 남편, 아버지 어머니...
이제 더 이상 울고 싶어도 눈물이 말라 울 수 없는 그들이 이곳에 와서 목놓아 누군가를 불렀다. 실향민 들이다, 실향민들은 설과 추석이 되면 망향제를 올리고 아픔을 달랜다.
바로 앞에는 임진강을 건너는 자유의 다리가 있지만 그 다리는 결코 자유롭게 건널 수 없는 다리다,
양측의 정부는 그들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쪽은 경제적으로 파탄에 빠져 스스로 붕괴되길 기다리고, 한쪽은 이판사판식으로 핵과 미사일만 만들어 낸다.
양측의 일반 백성들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단지 더 이상 죽고 죽이는 아픔이 없고, 자유롭게 왕래하며, 영원히 평화롭기만을 기원한다.
그러나 그날이 언제나 올 수 있는지.
그날이 오면 더 이상 실향의 아픔도 없고, 북한의 지하자원과 기초기술, 남한의 응용기술과 자본을 통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나라가 될 것 같은데.
경기도의 끝 안성부터 시작하여 경기삼남, 서울종주, 경기의주길 끝까지 왔다. 이제 의주길은 철책에 가로막혀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의주길의 끝까지 가볼 것이다. 그 날이 생전에 꼭 왔으면 기원하고 또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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