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조선왕조를 개국한 이성계는 1396년부터 98일동안 전국에서 19만 7천 4백여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북악, 낙산, 남산, 인왕산 능선을 이용하여 한양도성을 축성했다. 그러나 백성들의 피와 땀의 결실로 축성된 한양도성은 외침 때마다 백성을 책임져야 할 임금이 도성을 비움으로써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북악산 한양도성은 그 동안 민간인에게 폐쇄되어 있었으나 2006년 4월 와룡공원-숙정문-청운대-백악마루-창의문(4.3km)의 구간의 일부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이 군사시설인 관계로 창의문 안내소와 말바위 안내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표찰을 받고 탐방해야만 했다. 이번 2020년 11월에 와서야 폐쇄되었던 나머지마저 개방함으로써 52년만에 시민들이 마음껏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코스길이: 5.25 km
시점: 4호선 한성대역 5번출구
종점: 창의문
가는 길: 4호선 한성대입구 5번출구
오는 길: 윤동주문학관 정류장에서 버스 1020번 탑승후 3호선 경복궁역에서 하차
한양도성 순성길의 북악산 구간은 혜화문에서 출발하여 와룡공원을 지나 말바위, 숙정문, 창의문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1968년 1.21사태로 인하여 폐쇄되었던 북악산의 일부 구간이 52년만에 개방되었다. 그 길을 따라 걷는다. 한성대 입구 5번 출구에서 200미터 정도 가면 혜화문이 나온다.
한양에는 동서남북으로 4대문이 있고, 4대문 사이에는 작은 성문인 4소문이 있다. 4대문은 동, 서, 남, 북으로 유교 사상에 때라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으로 명명하였고, 4소문은 동북쪽의 혜화문, 서남쪽의 소덕문, 동남쪽의 광희문, 서북쪽의 창의문으로 이름 붙였다. 이 곳 동소문인 혜화문은 한양도성의 북동쪽에 있는 문이다. 창건 당시에는 홍화문이었으나 창경궁의 정문 이름을 홍화문으로 지음에 따라 중종 6년 1511년 혜화문으로 개칭했다. 문루가 없던 것을 영조 때에 지어 올렸다.
혜화문 옆으로 난 성벽을 따라 가면 성벽이 없어지고 주택가와 도로가 나타난다. 일제에 의해 많은 문화유산이 없어지고 훼손된 점이 아쉽다.
주택가를 지나 도로를 건너면 다시 성곽이 나타난다. 노랗고 붉게 물든 단풍과 성벽이 어우러져 그 가을 빛이 아름답다.
길은 가팔라지고 벌써부터 숨이 차온다. 성곽의 육중한 돌 하나, 하나가 절대 뚫을 수 없는 요새와 같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한양천도 후 궁궐과 종묘를 지은 후 곧바로 성을 쌓기 시작했다. 전국의 장정들이 노임도 주지 않고 무상으로 동원되었다. 공사 구간마다 감독관을 12명씩 배치하여 공사를 감독하게 하여 쉴 수도 없었다. 성벽에는 관직과 군명을 새겨 넣어 공사 후에도 책임을 분명하게 하였다. 지금까지도 견고하게 남아있는 거대한 석재들이 도성을 겹겹이 둘러싸여 있으나 적들이 쳐들어오면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의주와 강화도,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기 급급했다.
한양도성의 성벽의 일부가 임진왜란 때 소실 되었던 것을 광해군 때 개보수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다시 부서졌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맺은 조약 중에 성벽을 쌓지 않고 보수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방치하다가 숙종 때부터 수축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은 대체로 태조, 세종, 숙종 때 것이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우리가 마음대로 방위를 할 수가 없고 강대국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성곽주변에 취병이 설치되어 있다. 취병은 조선시대의 독특한 조경기법이다. 취병은 식물을 고재로 만든 친환경 울타리로 궁궐에 핵심지역과 일부 상류층의 정원에만 사용되었고, 공간을 깊고 아늑하게 만들어 생기가 나는 아름다움이 있다.
말바위안내소에서 출입증을 받는다.앞서 2007년 일부가 개방되었을 때에는 이곳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명부에 이름을 등록 후 탐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부터는 신분증 제시와 명부 작성 없이 출입증을 받아 스피드게이트를 통과하여 출입할 수 있다.
말바위 안내소에서 200미터 정도 가면 숙정문이 나온다. 불행하게도 현재 숙정문은 보수중이라 전체를 볼 수는 없다.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쪽 대문으로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으나 북정문(北靖門)으로 혼용되어 사용하다가 숙정문(肅靖門)으로 나중에 불리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북문이지만 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험준한 곳에 위치한 관계로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어 암문으로 사용되다가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사람의 출입이 없는 숙정문은 문루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1975년 숙정문을 복원할 때 원래 문루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갑론을박하다가 임진왜란 때 문루에 소실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문루를 지었다.
이곳은 1968년 1.21사태 이후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2006년 4월부터 일반에 개방하기로 하였다. 현존 도성문의 대부분은 일제에 의하여 좌우의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곳 숙정문은 산 중에 있어 좌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체로 남아있다.
숙정문을 지나 말바위 전망대에 올라서서 한양도성을 관망한다.
용의 움직임처럼 성곽은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
이번에 개방된 북악산 신규탐방로 제4출입로와 제3출입로의 사이 구간을 간다.
신규탐방로란 이름으로 수풀이 우거져 있고 갖가지 신기한 나무와 동물들이 나올 것 같았는데 뜻밖에 길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어 의외였다.
암문 남쪽은 예전에 다니던 길인데 오히려 이쪽이 더 개방되지 않은 길인 듯 착각이 든다.
지난번 TV 뉴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자물쇠를 열던 부암동 가는 철문이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념촬영을 한다. 인간이 장벽을 만들고 그 장벽을 다시 허물면 그것은 기념물이 되고 상징이 된다. 아무것도 없는 이곳이 하나의 스토리가 되어 사람들은 모여들고 기념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상징물이 있다. 1.21사태 때 총알을 맞은 소나무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김신조 등 31명은 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휴전선을 넘었다. 파주 법원읍 초리골의 우씨는 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다가 김신조 일당과 마주쳤다. 김신조 일당은 우씨를 죽일 것인지 말 것인지 일대 격론이 벌어졌다. 결국 신고를 하지 말라는 조건하에 죽이지 않고 나무에 결박만 해 놓는 것으로 결론짓고 계속 청와대로 진격했다. 밤이 되어도 나무하러 간 우씨가 돌아오지 않자 형제는 우씨를 찾으러 갔다, 그리고 묶여있던 우씨를 발견하고 경찰에 무장공비 침투를 신고 했다. 그러나 경찰은 반신반의하면서 상급기관에 알렸다. 그러는 순간 김신조 일당은 노고산을 지나 청와대 앞까지 행진하며 진격했다.
그 때 최규식 서장이 막아 섰고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그러나 김신조 일당은 검문에 불응하며 외투 속에 있던 기관총을 난사했다. 최규식 서장은 관통상을 입고 청와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현장에서 순직했다.
이로부터 총격전이 시작되자 김신조 일당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31명 중 겨우 1명만이 북한으로 도주에 성공하였고, 김신조를 제외하고 모두 사살되었다. 그리고 인왕산에 심어있던 김신조도 마지막에 자수를 하면서 청와대 습격사건은 막을 내렸다.
최초 신고를 한 우씨 삼형제에게 포상이 내려졌고 모든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소원을 말해 보라고 했다. 그러나 워낙 욕심이 없고 소박했던 우씨 삼형제는의 꿈은 한 사람은 이발소를 운영하는 것, 또 한 사람은 형사가 되는 것, 아직 초등학생인 막내의 꿈은 학업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결국 3명의 소원은 이루어졌고, 한 분은 이발소 운영, 한 명은 말단형사, 한 분은 중학교 선생으로 정년 퇴임하게 된다. 정말 착하고 소박한 사람들이다.
그럼 북한으로 도주에 성공한 유일한 1명 박재경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대장까지 진급하였고 특사가 되어 최근 서울까지 다녀갔다.
342m 북악산 정상이다.
북악산(옛이름 백악산)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주산(主山)으로 삼았던 산이다,
북악산 정상에 올라서면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우뚝 솟은 북악산인 백악산을 주산으로, 저멀리 보이는 남산인 목멱산을 안산(案山)으로 두어 남쪽 경계를 삼았다. 동쪽의 낙산이 좌청룡, 서쪽의 인왕산이 우백호가 되어 북악산 밑에 경복궁을 짓게 된 것이다. 수려한 산세의 기운을 온 몸으로 느껴본다.
이제 정상을 지나 창의문으로 길을 향한다.
북악산에서 창의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른 계단으로 되어 있다.
올라오는 사람들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온다. 길을 거꾸로 들었다면 저렇게 힘들게 올라왔을 것이다. 처음부터 혜화문에서 창의문으로 가는 길을 택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창의문이다. 사적 제149호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문으로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자하문이란 이름은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의 자하동과 비슷하여 붙은 별칭이다.
창의문은 한양순성길의 부악산구간의 시작점이자 종점이다. 창의문에서 시작하는 사람은 말바위 안내소에서 표찰을 반납하고, 혜화문에서 시작하는 사람은 이 곳에서 신분증을 지시하고 표찰을 받는다.
예전에는 대부분이 군사지역이라 예전에는 시내 쪽으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일부구간만 제외하고 사진촬영이 대부분 허용된다.
마지막 오는 길은 청와대 앞길을 지나서 경복궁역까지 걸어서 갔다. 예전에는 청와대 앞길을 지날 때면 신분증을 요구하고 때로는 길을 제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길은 마음대로 출입이 가능하고 사진도 자유로이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이다. 앞으로는 이 길 뿐만이 아니라 남과 북, 세계 어디든지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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