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주길

삼남길 과천구간 43길 한양관문길 경기남부1길

 

한 평생 살아보면 수많은 행복의 순간이 기억에 남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도 행복의 순간을 기억해 보면 어릴 때 친구들과 물장구 치고, 시냇가에서 고기를 잡고, 칡을 캐고, 술래잡기 놀이를 하던 기억, 청년 시절 밤열차를 타고 떠났던 여행의 행복의 기억들이 전부다.


성년이 된 후에는 성취를 위해, 명예를 위해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벌이에 시간을 빼앗겨 그 어떤 행복한 기억을 찾을 수 없다.


결국 청춘의 행복한 시간을 돈으로 바꾼 것이다.


IMF 체제가 오고 구조조정을 당하면서 모든 것이 사라진 후 그것을 깨달았다.
인생이란 행복의 기억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기에 행복한 순간을 만들기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투자의 방법 중 가장 좋은 방법은 길을 걷는 것이다. 그 길에 행복의 추억을 만드는 것이다. 그 길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세상과 다른 소통을 하면서 행복을 찾는 것이다.


삼남길을 걷는다. 이정표 안내 글을 보고 때로는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한길 한길 길의 의미를 새기며.


지금부터 삼남길의 이야기는 이정표 안내 글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은 지식과 길을 따라가며 느낀 감정과 함께 기록한 것이다.


삼남대로는 조선시대 6대대로 중 한양과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지방이었던 천 리에 달하는 긴 길을 삼남대로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육로교통의 중심축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이 이 길을 걸었고, 삼남지방의 풍부한 물산도 이 길을 오갔다. 이 길은 정조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기 위해 현릉원으로 가던 길이며, 선비들이 유배를 떠났던 길이기도 하다.


지하철 4호선 남태령역 2번 출구를 나와 남쪽 방향으로 조금만 걸어오면 남태령이 있다.

남태령


현재 남태령은 서울과 경기를 잇는 큰 도로이지만 옛날에는 한 두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길을 넓히면서 서울 쪽 반절은 사라졌고 과천 쪽 일부는 그대로 남아 있다.


남태령 마루 해태상으로부터 남쪽으로 10여미터 아래 왼편에 현재의 남태령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좁은 길과 도로와 만나는 입구에는 남태령 옛길 표지석이 있다.

과천루


남태령 옛길 표지석 오른쪽에는 과천루가 있다. 과천루에 서면 좌우로 청계산과 관악산이 감싸고 있는 과천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망루에 올라가 보지는 못하였다.

 

과천루로부터 오른쪽 낙엽이 깔린 계단을 사뿐히 밟고 내려가면 삼남길로 가는 길이 나온다. 과천으로 내려가는 이 길에 단풍이 장관이다.

길을 따라 내려가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용마골에 접어든다. 용마골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관악산에 진입하는 산길이 나온다. 산길로 가지 말고 개울길을 따라 리본이 지시하는 곳으로 올라간다.

계곡을 따라 오르고 또 오르면 왼쪽으로 삼남길로 접어드는 산길이 나온다. 그 산길에 꼬부랑 할머니가 등짐을 지고 조심조심 산길을 올라가신다. 인생의 모든 짐을 짊어진 듯이 그 길이 애달프다

나무에 매달린 타이어 그네와 몇 미터 앞에 보이는 나무 그네가 잘 어울린다.


길을 걷다가 운이 좋으면 공연도 볼 수 있다.

과천 향교로 향하는 길을 걷다 보면 온온사가 나온다. 온온사는 조선 제22대 정조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릉원에 가는 길에 머물렀던 곳으로 온온사라는 이름은 정조가 이곳에서 매우 편안하게 쉬어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현판의 글씨는 정조가 직접 썼다고 한다.

온온사

온온사 입구에는 역대 현감 비석군이 나온다. 이 비석군은 본래 과천면 관문리에 있던 비석을 이곳에 옮겨 놓은 것으로 역대 현감의 변화상뿐만 아니라 비석의 양식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사료라고 한다.

과천향교

온은사를 지나 관악산 입구쪽으로 걷다 보면 과천향교가 나온다. 과천 향교는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호 공자와 여러 성현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세운 조선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이다. 조선태조 때 처음 세워졌는데, 창건 후 1400년에 소실되어 1407년에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불에 타 다시 세웠다가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1690년(숙종 16)에 이 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예전에 과거를 보러 가던 유생들이 북적되던 그 길은 이제 정부관료들과 공무원들이 많이 사는 깨끗하고 잘 정리된 곳으로 변했다. 그 과천의 골목길을 지난다.

과천정부종합청사

 

과천정부청사 도 지나면 보광사에 다다른다. 이곳은 역사의 기록이 없는 사찰로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것을 1946년에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유물로 보광사 삼층석탑과 목조여래좌상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9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고 한다.

가자우물(찬우물)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줄타기의 명인 김영철 기념비가 나온다. 김영철 기념비 바로 옆에는 가자우물이 있다.

이곳은 정조가 능행차를 가던 중 이 부근에서 갈증을 느끼자 한 선비가 이 우물에서 물을 떠다 바쳤다고 한다, 물을 마신 정조는 물맛이 유난히 좋다고 이 우물을 당상의 품계를 내렸다고 한다, 그 때부터 이 우물을 '가자우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또 물맛이 좋다고 하여 찬우물 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이 곳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안양시 관양동에 이른다. 왼쪽에 작은 언덕에 올라가면 돌로 된 계단이 보인다. 그 계단을 올라가면 ‘관양동 선사유적 주거지’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다는 집터라고 한다.

인덕원

여기서 좀 더 길을 내려가면 인덕원이 나온다. 인덕원은 인덕원은 안양, 과천, 의왕을 잇는 경기남부 교통의 요지다.
일찍부터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았고, 자연발생적으로 주막과 가게들도 많이 생겨났고 지금도 밤이면 취객들로 불야성을 이룬다.

인덕원 6번출구와 5번출구 사이에 골목으로 들어가면 인덕원 옛터의 표지석을 볼 수 있다.

이제 긴 여정의 하나의 길을 마무리했다. 의주길이 대륙으로 향하는 역사의 길이라면 삼남길은 남쪽으로 향하는 우리 조상의 얼이 서려있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간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