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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공연

빈센트 반 고흐, 그 위대한 여정

누구나 인생 길은 험난하고 드라마틱하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면 모든 것은 잊혀진다. 허무하다. 그래서 인생은 비극이라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 사람의 스토리를 누군가가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겨진다면, 그리고 그 기록이 흥미진진하고 역사의 장으로 남겨진다면 어떨까?


반 고흐도 그랬다.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 작품은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고흐의 영혼의 동반자였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가 테오의 아내에 의해 영문으로 번역되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세상은 그를 기억하고 그의 작품은 고가에 거래되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빈센트 반 고흐가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걷기 위해 군포문화예술회관에 간다. 그곳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전세계의 흩어진 작품을 3D프린트로 복제한 빈센트 반 고흐의 레프리카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반 고흐의 삶과 작품에 대해 작품해설가가 열정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반 고흐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을 그 분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래의 글 들은 나의 견해가 아닌 그 해설가의 해설과 전시관에 붙어있는 안내문을 기록한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화가로 ‘불멸의 화가’, 태양의 화가’로 불린다. 1853년 3월 네덜란드 작은 마을인 준데르트에서 엄격한 목사의 6남매중 맏아들로 태어난다. 사실 그가 태어나기 전 형이 한 명 있었으나 형은 그가 태어나기 전 죽었다. 빈센트는 그의 죽은 형의 이름이기도 했다.

 

1. 화가의 길에 들어서다


화가가 되기 전 반 고흐는 상업화랑의 직원, 교회의 보조교사, 책방 점원, 전도사 등 여러 직업을 거쳤다. 그러면서도 틈이 나는 대로 철학서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


반 고흐는 1880년경에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는다. 파리의 구필화랑에서 일을 한 덕분에 역사적인 작품과 현대적인 작품을 접하며 화가의 길을 출발할 수 있었다. 구필화랑에서 일하던 동생 테오와 헤이그에 사는 화가였던 사촌 매형 모우베가 고흐를 지원했다. 1880년 10월 고흐는 브리셀로 이사를 했다. 초기에는 밀레의 작품을 수없이 베껴 그리면서 드로잉과 정밀 묘사를 연습했다. 다소 감상적인 밀레의 리얼리즘은 고흐에게 중요한 주제를 제공했는데 특히 일하는 농부와 풍속화를 그린 것을 보면 어두운 우수가 스며드는 것을 볼 수 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

고흐의 초기작품에서 농부와 직조공, 광부처럼 도시에 살지 않는 노동자를 즐겨 그렸다. 반면 파리나 런던에서의 대도시의 삶은 그리지 않았는데 이것은 사람이 기계의 부품처럼 다뤄지는 산업화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고흐는 몇 가지 정물 시리즈를 그렸다. 이 작품들은 모두 부드럽고 섬세한 붓 터치의 세밀한 색으로 채색된 작품들이다. 거의 200여점의 유화작품을 제작하였으나 대부분 파손되었다.

 

2. 파리에서의 도전과 성장

 

1985년 11월 말 고흐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만 가방에 넣은 체 안트웨르펜에 도착했다. 파리로 가기 위해 벨기에에 유명한 항구 도시인 이곳에 잠시 머무른 것이다, 이 체류는 고흐의 창작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주 이후 2년 동안은 초기에 그렸던 어둡고 우수에 잠긴 농촌을 벗어나 새롭고 진보적이며 전위적인 그림을 그렸다.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 작은 방을 얻고, 항구 근처에 있는 골동품 가게에서 헐값에 사들인 일본 판화로 벽을 꾸몄다, 유럽에서의 사진과 같은 그림에 비해 동양의 그림과 판화들은 완전히 다른 예술의 세계였다. 고흐는 이 일본 판화들을 통해 장식적인 색체 감각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배우기를 원했다. 용광로와 같은 파리에서 유일한 매개체인 그림을 가지고 다양한 표현 형태를 모색한 셈이다. 186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일본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개방에 대한 새로운 바람이 불면서 사람들은 낮 설고 세련된 문화를 지닌 이국의 문물을 찬미하였다. 상류사회의 부인들은 부채를 지니고 기모노를 입었으며 병풍과 도자기들로 집안을 화려하게 꾸몄다. 백화점에는 일본물품 매장이 들어섰고 진정한 양식이라고 할만한 것이 생겨났는데 그것은 곧 조형미술에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서 들어온 판화는 값비싼 것이든 아니든 갑자기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일본 판화에서 볼 수 있는 확고한 윤곽은 인상주의가 제기한 형태에 대한 적절한 답이 되었고, 그것의 장식적인 채색은 자연주의자들이 재현한 가난의 비참함에 대한 반작용처럼 여겨졌다. 여러 화가들과의 교류와 파리에 몰아친 일본풍의 영향에서 고흐도 많은 영감을 얻게 된다.

 

3. 남프랑스 아를, 고독과 희망

 

고흐는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1888년 2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아를 지방으로 이주했다. 아를에서 반 고흐는 파리시절에 이론적으로 발전시켰지만 일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죽을 때까지 본질적으로 유지했던 이 화법은 우리가 오늘날 고흐에게서 전형적이라고 느끼는 화법이다. 고흐는 남부 프랑스의 눈부신 색채에 대한 희망을 품고서 아를로 이주를 했다. 그는 편지에서 이주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1888

"사람들은 그 곳에서 붉은색과 초록색, 푸른색과 오렌지색, 짙은 노랑색과 보라색의 아름다운 대조를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야."

 

또한 아를은 드가가 이미 여름 한 철을 보낸 곳이었다. 또 파리의 화가들과 오랜 논쟁을 벌이면서 두껍게 덧칠한 꽃의 정물을 그렸던 인물이며, 고흐가 숨은 실력자로 생각했던 아돌프 몽티셀러도 아를 근처 마르세유에서 살았다. 에밀졸라도 같은 지역 출신이고 세잔도 오래전부터 엑삼프로방스에서 살고 있었더. 게다가 아를 여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말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전체적인 효과에서 상호상승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보색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순수하고 강렬한 색채로 그림을 그렸다. 고흐의 짧게 끊어지는 화법과 밝은 보색의 색상체계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그의 예술은 매우 독창적인 것이다. 종종 그의 색채를 과장하거나 그가 그림을 위해서 발전시킨 색채를 체계에 적합하도록 사용했다.

아를의 고흐의 방 1888


예술공동체를 꾸려 동료들과 깊이 교감하기 원했던 고흐는 방이 네 개가 있는 노란 집을 빌려 테오에게 희망을 전했다.
"고갱이 이곳에 온다면 우리가 꿈꾸는 사업이 확장될 거야. 나는 그가 이곳을 떠나는 것을 보지 않겠어."

해바라기 1887


1888년 10월, 고갱은 테오와 고흐의 부탁에 따라 아를에 당도하고 노란 집에서 함께 지내기 시작하지만 이것은 그저 비극의 시작일 뿐이었다. 고흐는 평소 고객을 동료 이상으로 매우 아꼈다. 수작으로 꼽히는 <해바라기> 연작은 고갱을 기다리며 그의 침실을 꾸미기 위해 그리기 시작한 작품으로 해바라기는 고갱과 고흐의 우정이 꽃피던 시기를 상징한다. 그러나 둘의 우정은 9주만에 파경을 맺게되고 고흐의 아를 생활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고흐는 아를에서 머무는 동안 200여점의 유화를 남기며 우수한 수작을 낳았지만 그의 영혼과 몸은 점차 병들어 간다.


4. 생레미 요양원, 걸작의 탄생

 

"나는 이제 화가공동체를 이루는 일은 불가능하고 아를에서든 다른 여느 곳에서든 혼자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내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나 잠시 병원에 들어가 있는 편이 낫겠다."


이미 오래 전부터 모든 관례에서 벗어나 살아온 그였지만 이런 결론을 내리기는 몹시 힘들었다. 고흐는 병이 깊어진데다 아를 사람들이 그를 감금해달라고 했던 사실에 깊이 상처를 받아서 자신이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고 느꼈다. 사랑하는 동생 테오가 결혼을 하게 되자 경제적 도움이 끊어질까 겁이 났고, 그의 열렬한 소망이었던 화가들의 공동체라는 꿈도 고갱이 떠나면서 사라져버렸다.

아를에 있는 요양병원의 정원

1889년,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한 고흐는 간질성 발작과 망상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소용돌이치는 불안과 두려움을 그는 더욱 더 작품 위에 토해내기 시작한다, 아를에서의 시기를 통해 색채발견에 있어 한 발 나아갔다면 생레미에서의 말년은 자연 속에서 색체를 완성시켜 나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발작으로 인해 정신은 온전할 수 없었고, 고흐는 점차 불타는 듯한 예술혼으로 나아간다. 2주 또는 4주에 한번씩 찾아오는 발작의 고통이 이끌어낸 붓 터치야말로 반 고흐의 진솔한 영혼이었던 것이다.

별이 빝나는 밤 1889
아이리스 1889

고흐에게는 그림만이 그를 삶에 연결하게 하는 유일한 끈이었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은 병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강렬한 느낌을 준다. 그는 격렬한 창조의 열정의 사로잡혀있었다. 그 그림들은 고통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이고 지속적인 작업으로 발작을 막아보려는 시도이며 자신의 격렬한 감정들을 배출시킬 안전핀이기도 했다.


5. 오베르 쉬르 우아즈, 여정의 끝

 

꽃이 핀 아몬드 나무 1890

1890년 5월, 고흐는 생 레미의 요양생활을 접고 파리 북쪽 우아즈 강변의 작은 도시인 오레르로 거쳐를 옮겼다. 과수원, 밀밭, 포도밭 등이 펼쳐있는 오베르의 풍경은 고흐에게 네덜란드 브라반트를 추억하는 동시에 그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화가 도비니가 머물렀던 곳이었기에 매우 뜻 깊은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극심해진 정신분열증세에도 불구하고 단 두 달간 머무른 오베르에서 고흐는 불타오르는 정열과 혼을 쏟으며 80여점의 작품을 그렸다. 고흐의 주치이자 화가 추신의 의사인 가세박사는 고흐의 예술적 교감을 나누면서 오베르 시기의 고흐에게 중요한 존재가 된다. 그는 초상화 모델로서 적극 나섰는데 <가세박사의 초상>은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가세박사의 초상 1890

이 시기 고흐가 주력한 소재는 밀밭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강조하기 위해" 직사각형의 수평형 캔버스를 사용한 고흐는 황량한 밀밭 위로 뿌리 채 흔드는 자신의 영혼을 담아냈다. 생의 마지막에 그려진 대표작 <까마귀가 나는 밀밭>,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한 밀밭>, <나무의 뿌리>는 장엄한 색채를 통해 고흐의 요동치는 심리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매우 짧고 자잘한 필치로 그려낸 오베르의 풍경과 쓸쓸한 밀밭의 정취는 밝고 환했던 이전 색채의 품을 벗어나 깊이감이 있는 푸른 색채로 거듭난 결과였다.

까마귀 나는 밀밭 1890
마차와 기차가 있는 풍경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해질녘 밀밭으로 나가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가세박사와 테오가 그의 임종을 지켰고 29일 고흐는 결국 눈을 감았다. 고흐의 불운했던 37년의 삶은 그렇게 마감되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가지 루머가 있지만 "고통은 영원하다"라는 말을 남긴 그의 최후가 극지에서 벌인 투혼의 결과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흐의 죽음 후 반년 만의 동생 테오 또한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영혼의 동반자였던 두 형제는 오베르에 나란히, 그리고 영원히 잠들게 된다.

귀애 붕대를 한 자화상 1889

작품해설가의 열정적인 고흐의 생애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그 동안 고흐에 대해서 느꼈던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고흐의 삶은 전혀 절망적이고 비극적이지 않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삶을 사랑했고 세상의 빛을 즐겼고 행복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아를의 푸른 광장에서 야외 카페의 밤 풍경을 담은 그림을 그리며 영혼의 동반자 동생 태오에게 쓴 편지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푸른 밤, 카페 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 그 위로는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여. 바로 이곳에서 밤을 그리는 것은 나를 놀라게 하지. 창백하리만치 옅은 하얀 빛은 그런 밤 풍경을 제거해 버리는 유일한 방법이지. 검은 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아름다운 파란색과 보라색, 초록색만 사용했어. 그리고 밤을 배경으로 빛나는 광장은 노란색으로 그렸단다. 특히 이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즐거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