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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인천둘레길 13코스 월미도 - 근대 역사의 현장

섬의 모양이 반달의 꼬리처럼 휘어져 있어 월미도다. 월미도는 한반도 전쟁 역사의 현장이다.

명청 교체기의 광해군의 실리외교는 탁월했다. 그러나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는 국익보다는 명분만을 앞세운 도덕외교를 했다. 그 결과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는 난을 피해 강화도로 향했다. 그 피난길이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피했고,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효종은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강화도 피난 길이 차단될 경우를 대비해 우회로를 만들었다. 이 우회로로 가는 길에 잠시 머물 수 있는 장소로 월미도를 택했다. 

근대에는 영국 순양함이 월미도에서 침몰하여 448명이 익사한 사건이 있었고, 소월미도에서는 러시아 전함이 일본 전함과 부딪쳐 침몰하면서 러일전쟁의 발단이 되기도 하였다. 인천항의 개항 전후로는 외세의 이권다툼으로 수난을 겪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군사기지로 이용되었다. 한국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의 전초지였으며, 그 후에는 오랫동안 국제연합군이 주둔하였다.

오늘은 한반도 전쟁역사의 현장인 인천둘레길 13코스 월미도를 간다.

 

 

인천역 - 대한제분 - 월미공원정문 - 전통공원 - 한국이민사박물관 - 월미테마파크 - 월미문화의 거리 - 정문

인천역

 

출발은 인천역 1번출구다. 인천역 앞에는 한국철도의 시작이라는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경인선은 서울 구로역과 인천역을 잇는 총 27km의 일제가 건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이다. 경인선의 종착역인 인천역은 1899년 개통하였다. 경인선은 조선 내의 자원을 일본으로 보내려고 인천항으로 옮기기 위한 수단으로서 건설하였다.

 

8부두 주차장


예전에 철재와 목재 등을 하역하던 장소였고 지금은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제8부두를 지나서 월미도에 들어선다. 월미도는 예전에 섬이었지만 1920년에 돌축대를 쌓아 내륙과 연결되었다.

월미도에 들어서니 월미공원이 보인다. 왠지 가슴이 설렌다. 아주 오래 전에 놀러 왔던 기억 때문일까? 화려한 꽃들과 신랑신부 형상이 방문객을 반긴다. 

월미도는 원래 민간에게 개방이 되지 않았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했고 다시 국군이 주둔했다. 민간에게 개방된 것은 군부대가 이전한 1980년 이후부터다.
 


월미도는 몇 시간 안에 섬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작은 섬이다.  먼저 한국전통공원에 간다. 이 정원에는 전통적이고 고풍스러운 옛 정원을 재현해 놓았다. 마치 창덕궁 후원에 부용지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이곳에서 왕과 왕비가 되어 정원을 거닐어 본다.

 

한국의 전통정원은 자연을 닮았다. 조상들은 환경을 훼손하지도 않고 인위적인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게 꾸몄다. 그곳에서 물도 길어보고 쟁기질도 해본다. 느릿느릿 고즈넉한 산책을 즐겨본다.

 


월미산에 올라 넓은 산책길을 걸어본다. 산길이라기 보다는 평지같은 걷기 쉬운 길이다. 산 허리에서 인천항을 바라본다.  인천은 세계로 가는 출발점이다. 인천은 바다를 통해 주변 나라들과 교류하며 대한민국의 발전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인천항은 지리적 중요성과는 달리 조수간만의 차가 최고 10m에 달해 항만으로서는 결정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인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항만개발 사업이 필연적이었다. 갑문식 선거시설 확보를 주요추진계획으로 세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그 때문이다, 최초의 갑문식 전천후 항만시설이 제1선거가 건설된 것이다, 이 공사에 김구선생이 노역을 하였다. 

평화의 어머니 나무

월미도가 수없이 침략을 받는 동안 느티나무에게도 침략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딱따구리가 집을 지었다가 올빼미에게 쫓겨나는가 하면 산새와 벌레들이 자신을 먹이로 하면서 둥지를 지었다. 수없이 많은 새와 동물들이 먹이를 삼고 집을 짓고 살다가 떠났다. 월미도의 상처와 느티나무의 운명은 같았다.

나무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바로 땅속 깊이 자리 잡은 어머니와 같은 뿌리였다.
비록 가지는 잘려나갔지만 뿌리는 여전히 단단히 땅에 박혀 있었다. 

월미도에도 다시 평화가 깃들기 시작했다.월미섬 앞바다는 이제 화려한 불빛과 상선들로 아름답게 일렁이고 있다. 월미섬과 함께 240여년의 오랜 인고의 세월을 견디느라 매끈하던 나무껍질이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져 있다. 월미의 슬픈 역사처럼 수많은 상처는 남았지만 나무는 행복하다. 다시 월미섬의 평화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되어서.

월미돈대

돈대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설치된 방어물이다. 주로 성을 쌓기 곤란한 능선이나 계곡, 해안가에 흙이나 돌을 쌓아 작은 규모로 만들었다. 월미돈대는 조선 숙종 때 축조되었다. 월미돈대는 외세의 침입이 잦아든 조선 후기에 주요한 군사시설로 이용하였다.

한국 이민사박물관


월미산을 내려오면 이민사박물관이 보인다. 필자는 젊은 시절에 유럽과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선진국부터 오지에 이르기까지 각 나라에 출장을 간 적이 있다. 현지를 방문할 때마다 그곳에는 어김없이 성공한 한국의 이민자들이 있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우리 조상들의 이런 개척자 정신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전한다는 취지로 2008년에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우리 선조들이 먼 이국 땅에서 고난과 역경을 극복했던 이민의 역사가 모두 담겨있다.

이민1세대 함해나 할머니
멕시코 에네켄 농장

이곳에는 1905년 몽골리아호를 타고 하와이 이민을 떠나 독립운동과 한인사회에 힘썼던 이민 1세대 함해나 할머니의 조각상이 보인다. 1905년 일본인의 광고에 속아 멕시코 에니캔 농장의 노예로 팔려간 멕시코 이민자들의 삶도 보인다. 멕시코만 메리다 항구에 도착하자 지상낙원을 꿈꿔온 그들 앞에는 황색 모래 바람이 날리는 불모지와 가시 돋친 애네넨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은 에네켄 가시에 찔리고 긁혀 하루도 피가 멈출 날이 없었다. 허리를 펴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채찍을 맞으며 한끼 밥값도 안된 품삯을 받으며 노예 같은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밥을 굶어가며 피 같은 돈을 모아 독립운동에 보탰다. 그런 아픔을 겪고 현재 멕시코에 거주하고 있는 이민자의 후손은 11,000여명이다. 20여년전 필자가 이민자 후손을 만났을 때 그들은 멕시코의 상류층으로 멕시코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서독에 간 간호사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연금과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의 70~90%를 조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하였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한국에 송금한 외화는 매년 5천만 달러에 달했으며, 이 금액은 한때 한국 GNP의 2%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벌어들인 외화는 한국의 경제 성장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미소양국의 대리전쟁인 한국전쟁의 전세를 한 순간에 되돌린 인천상륙작전의 첫 작전 포인트였던 그린비치가 월미도에 있다. 인천상륙작전은 세기의 도박으로 불렸다. 간조시 3.2Km나 되는 거대한 갯벌로 상륙이 불가했고, 평균 6.9m, 최대 10m이상의 밀물과 썰물의 차, 저녁 만조시 상륙할 수밖에 없어 보안의 유지가 어려웠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그날의 월미도는 불바다였다. 항공기에서 떨어트린 네이팜탄이 지붕에 떨어지는가 하면 항공모함에서도 월미도를 향해 집중적으로 포격했다. 멕아더는 문화재나 민족유산, 거주민들은 아랑곳이 없었다. 오직 승리만을 위해 건물이며 나무들을 쓰러트리고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1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전쟁이 끝난 뒤 월미도는 군사기지가 되어 주민들은 강제로 쫓겨났고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
갈매기도 슬피 우는 이별의 인천항구
항구마다 울고 가는 하루살이 사랑인가
정들자 이별의 고동 소리 목메어 운다.

바닷가에 서면 전쟁의 아픔과 설움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다시 월미도에 평화가 찾아왔다. 이제 월미도는 인천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디스코팡팡’과 ‘바이킹’ 등 놀이시설이 즐비하다. 연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사랑을 나눈다. 연로하신 분들은 무대에 올라와 트롯 가수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춘다. 그날의 그 아픔은 모두 잊었다.  월미 문화의 거리는 낮과 밤의 모습이 다르다.  거리의 조명이 하나 둘 밝혀지면 월미도는 또 다른 모습이 된다.

퇴역 해양경찰선

월미 문화관으로 가는 길에 임무를 다한 해양 경찰선이 전시되어 있다. 해양 경찰선이 서 있는 곳은 인천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이 처음 상륙했던 장소인 '그린비치'다.

오진석 이청호 흉상

응급환자 구조를 위해 긴급 출항 중 영종도 해상에서 충돌사고로 순직한 오진석 경감의 흉상이 있다. 

그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동료들을 병원으로 먼저 보내고, 2차사고 예방을 위해 공기부양정을 기지로 안전하게 복귀시킨 후에야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몸 상태가 괜찮은지?" 묻자

"내 걱정은 말라, 다른 직원들과 함정은 괜찮은가?" 라며 끝까지 동료들과 임무만을 생각하던 그였다.

그 옆에는 불법조업 중국어선 단속 과정에서 안타깝게 순직한 해양경찰 이청호 경사 흉상이 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의 경의를 표한다.

해군 제2함대사령부 주둔 기념비

월미도는 한국전쟁 후 처음으로 북한 해군과 싸워 승전한 연평해전의 주역 제2함대사령부가 반세기 동안 주둔했던 곳일 뿐만 아니라, 세계 전쟁사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연합군 주력부대가 상륙했던 곳이기도 하다.

월미문화관


월미문화관은 전통문화전시관이다. 이곳에서는 관혼상제, 서당과 향교 같은 교육과정, 궁중음악과 궁중음식, 왕의 경연과 일과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한복과 가채, 궁중복식도 체험해 볼 수 있다.


일기예보에 인천에 폭우가 내린다고 했다. 예보는 시간마다 수시로 변했고 12시부터 잠깐 맑은 1시간이 있다고 한다. 둘레길 안내에는 거리 5km, 1시간 12분이라고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짧은 시간에 월미도를 모두 둘러보기로 마음 먹었다. 

막상 월미도를 관람하자 그 시간 안에 모두 둘러보기는 불가했다. 작은 섬 안에 우리나라의 모든 전쟁의 역사가 곳곳에 숨어 있어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시간은 늘어나 5시간이 훌쩍 넘었고 걷는 거리도 늘어나 11km나 되었다. 다행이 일기예보가 틀려서 관람하는 시간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월미도는 전쟁 역사의 산 증거다. 나라의 전쟁이 있을 때마다 월미의 산천은 불게 타오르고 폐허가 되었다. 모두가 전쟁의 폐허로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을 때 월미는 다시 일어섰다. 우리 대한민국도 세상에 선진국으로 우뚝 섰다. 오늘의 일기예보가 틀린 것처럼.

앞으로도 월미 평화의 나무처럼 월미와 대한민국은 찬란히 빛날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후손을 위해 갖은 고생을 이겨 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