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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인천둘레길 14코스 부둣길 - 근대 역사의 현장

창문이 없는 공장 안에는 하늘색 작업복을 입은 여공들이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인다. 월급은 여공들의 작업량에 따라 매겨진다. 작업반장은 스톱워치를 들고 작업시간을 잰다.  그곳에는 전화도 없고 화장실도 없다. 소변을 참아가며 기계처럼 손을 움직인다. 점심시간 벨이 울린다. 여공들은 식당으로 내달린다. 빨리 먹고 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갖기 위하여 달려간다. 식사가 끝나면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선다. 전화 대기 줄이 길어지면 점심시간이 끝날까 봐 발을 동동거린다. 그래도 그들은 불평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피땀이 가족을 살리고 조국의 근대화를 앞당긴다는 생각에.

오늘은 근대 역사의 현장인 인천둘레길 14코스 부둣길로 역사여행을 떠난다.

인천역 - 대한제분 - 북성부두 - 동일방직 - 만석동행정복지센터 - 화도진 공원 - 괭이부리마을 - 만석부두 - 두산인프라코어 - 동인천역

인천역
대한제분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더위로 반팔로 길을 나섰는데 10월에 접어드니 날씨가 제법 쌀쌀하여 긴 팔 옷을 입었다. 완연한 가을이다.

13코스의 시작점인 인천역을 출발하여 제8부두, 대한제분 공장을 지난다. 곰표 밀가루를 보면 아련한 어릴 적 생각이 난다. 지금은 쌀과 함께 우리의 주식이 되어버린 밀이지만 쌀이 부족했던 어릴 적에는 밥 대신 어쩌다 먹는 별미였다.

북성포구

북성포구를 지난다.  삼사십 년 전, 이 일대엔 판자촌이 밀집하고 폐 기관차가 방치되어 있었다. 후미진 곳에서는 사람들이 함부로 배설하여 포구를 더럽혔다. 이런 이유로 북성포구는 똥바다라고도 했다.


북성포구는 밀물 때 삼십여 척의 배가 들어오는 작은 포구다. 어민들은 어선을 띄우기 위해 그물을 손질하고 싱싱한 생선, 게와 세우 들이 거리에 즐비하다.  사람들은 값싼 어류를 사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이곳을 찾는다.

 

만석동 굴 직판장

좁다란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만석동 굴 직판장이 나온다. 생굴을 파는 수많은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구수한 굴국밥이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군침이 나온다.

 

만석 어린이공원


이 일대에 도쿄시바우라제작소 사택이 있었다. 길게 늘어선 사택은 한 지붕아래 여러 가구가 살았다. 지금도 사택 형태나 구조, 사택 사이의 길은 남아 있지만 대부분의 집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철거되었다. 사택 안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아침이면 화장실 앞에 줄을 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집은 그저 자고 끼니를 해결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동일방직

동일방직은 연포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후 청나라와 일본의 상인이 독점하던 광목시장을 민족자본으로 흡수했고, 국내 노동운동의 한 획을 그은 역사의 현장이다. 이 공장의 전신은 1934년 일제가 가동하기 시작한 도오요 방적 인천공장이다, 24시간 3교대 근무였으며 노동자가 3천명을 넘을 때도 있었고 80%가 여성이었다.

공장 안은 후끈했다. 솜과 실에서는 먼지가 날렸다. 우리들은 앞치마 주머니에 있는 스펀지로 얼굴이고 허옇게 들러붙은 실 먼지를 수시로 털어야 했다. 그래도 월급을 주고 기숙사와 산업체 부설학교도 있는 회사라고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그때는 고향 부모님 먹고 살 생활비며 남동생 학비 댈 생각에 힘든 줄을 몰랐다.

 

만석동 행정복지타운


동구는 구한말 서양외세에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하여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는 근대화의 역사적 현장으로 경인공업지대의 중심지였다. 제물량로는 미추홀구 숭의동 능안 삼거리와 동구 화수동 화수부두를 잇는 인천의 도로이며 제물량로라는 이름은 옛 제물포진이 있던 지역을 통과하는 도로로 원래 제물포의 위치를 전하기 위하여 이름 지은 것이다.

 

삼화제분 인천공장

1917년 나가사키 출신의 일본인 사업가 사이토 큐타로는 인천 만석동에 사이토 정미소를 운영했다. 정미업으로 돈을 번 사이토는 1921년 용산에 풍국제분을 설립하였고, 1935년에는 인천의 사이토 정미소를 합병하여 풍국제분 인천공장으로 운영했다. 해방 후 적산기업으로 운영되던 풍국제분은 1957년 삼화제분이 인수했다.

공장 야적장엔 밀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다. 일을 하다 보면 하역인부들이나 청소아줌마들이 바지 속에 밀이며 밀가루를 숨겨 빼돌렸다. 이렇게 흘러나온 밀가루는 집집마다 수제비, 칼국수 등으로 끼니가 되었다. 너나없이 배고픈 시절이었다.

화도진 공원

화도진에 들어선다. 화도진이라는 이름은 육지를 뜻하는 '곶'에서 '곶섬'이러고 부르다가 된 발음 '꽃섬'이 된 것을 한자어로 '화도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화도리'의 지명을 따서 '화도진'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화도진은 인천 앞바다를 지키고 있는 6개의 포대를 지휘하는 야전사령부 역할을 했다. 화도진의 임무는 강화수로를 통해서 서울로 접근하는 적선의 수로통과를 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천과 부평의 육로를 통하여 서울로 접근하려는 적선의 해안 상륙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화도진 표석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장소가 화도진으로 쓰여있다. 하지만 1893년 9월6일자 인천 감리서가 중앙에 올린 지도를 근거로 체결장소는 화도진이 아닌 현 파라다이스 호텔부지 입구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2006년 파라다이스호텔에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장소'란 표지석이 세워진다.

 

화도진 동헌

세상물정을 모르는 조선은 탐욕스런 강대국들의 먹잇감이었다. 먼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조일수호통상관계가 체결되고 인천을 비롯한 항구가 개항되자 미국도 조선과 수교를 서두른다. 미국은 일본외상의 소개로 부산에서 교섭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1879년 청나라는 일본의 조선침투의 야욕과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부사 이유원에게 미국과의 수교를 권고한다. 이 권고안으로 조선정부가 조미수교를 검토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어 1880년 김홍집이 청나라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들여온다. 《조선책략》은 ‘친중’, ‘결일’, ‘연미’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개국, 균세, 자강책이었다. 《조선책략》은 조선정부 내에 큰 영향을 미쳐 조선의 대외정책이 개국정책으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측 전권대신 신헌

조선 정부는 이홍장의 주선으로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조선 측 전권대신 신헌과 미국 측 전권공사 슈펠트 간에 전문 14관으로 이루어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의 1조의 내용은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다른 한쪽 정부는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을 한다”이다.

순진한 조선은 위기에 달했을 때 대국인 미국이 도와줄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미국은 1905년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는다. "미국과 일본 양국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각각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조선은 일본에 패망했다.

그런 이유로 1900년대에 우리나라 사람 사이에게는 유행어가 떠돌았다.

미국: 믿지 마라
소련: 속지 마라
일본: 일어난다.

조선: 조심하라.

화도진 전시관에 이날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조선측 전권대신 신헌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만석부두 조감도
만석부두 주변 공장들
만석부두

평화로운 항구에는 개항의 물결이 휘몰아쳤다. 1906년 이나타 가스히코에 의해 만석동 해안이 매립되었다. 지금은 이곳을 만석부두라고 부르지만, 예전에는  '조가부두'라고 불렸다. 부두에는 굴막이 있었다. 피란민들은 만석부두에서 배를 타고 영종도, 팔미도 등지로 나가 직접 캐온 굴을 까서 연안부두 상인들이나 굴막을 찾는 사람들에게 팔기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지금은 굴막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대신 인천 공업단지와 전국에서 운송된 컨테이너와 중국으로 가는 선박 수요도, 이 곳 만석부두로 몰린다. 


괭이부리마을을 지나간다. 사람들은 묘도(猫島)를 괭이부리라고 불렀다. ‘괭이’는 고양이 또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는 괭이갈매기'를 의미한다. ‘부리’는 봉우리 또는 새의 부리를 뜻한다. 따라서 '괭이부리' 지명의 의미를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묘도의 산이 고양이주둥이처럼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묘도가 바닷가에 있는 섬이어서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는 괭이갈매기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석동을 매립하여 묘도가 사라졌다. 1930년대 중반 조선기계제작소 공장 터를 닦으며 묘도의 산을 깎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인지 이곳 일대를 원괭이부리마을이라 부른다.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

괭이부리마을은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 됐던 곳이다.

 

 

원괭이마을 특화거리

이 마을은 1900년대 초에는 20∼30가구만 사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1940년대 일제는 이곳에 부두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 기숙사를 지었다. 한국전쟁 때는 황해도 피란민이 이곳에 몰려왔다. 1970~80년대는 일자리를 찾아온 이농민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집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주민들은 공동화장실을 이용했다. 아침이면 화장실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

지금 이곳은 달라졌다. 집집마다 화장실이 있는 보금자리주택이 들어섰다. 마을은 고요하고 소설 속에 나왔던 아이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예전에 이곳에 기차역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었지만 이곳에는 만석부두역, 원괭이마을 역이라는 그림이 있다. 바닥에 철길도 그려져 있다. 연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이곳의 풍경을 찍으며 추억을 만든다.

두산인프라코어 공장
동인천역

두산인프라코어 공장을 지나 종착지인 동인천역에 도착한다. 가는 길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눈에 띄었다.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

근대화의 시절에는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되는 길이다'라는 문구만이 있었다. 근로자들은 '근대화의 기수'라는 슬로건 아래 저임금으로 철야를 밥 먹듯이 하며 자신들의 귀중한 시간을 노동에 바쳤다. 기업들은 더욱 더 부자가 되었고 근로자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80년대 말 근로자 권익을 위한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 결과 월 10만원의 노동자의 월급은 불과 3~4년만에 50~60만원으로 치솟았다. 그래도 기업들은 여전히 흑자를 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전에 기업들은 얼마나 이익을 내고 있었다는 것일까?

이제 근로자들은 삶과 일의 균형을 이루며 주 40시간의 워라벨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시차출근제, 선택근무제, 재택근무제, 원격근무제, 육아휴직 등 복지혜택을 늘이고 있다. 이를 통하여 근로자들은 여가시간을 즐기며 기업들은 생산 효율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1978년 출간된 조세희 작가의 가난한 자와 거인으로 상징되는 소설인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난쟁이들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월세도 내지 못하고 가난 때문에 자살하는 복지 사각지대의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 이제는 가난한 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근로자와 기업 모두가 잘 사는 행복한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