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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인천둘레길 12코스 성창포길 - 우리나라 근대문화를 만나는 길

한반도는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커다란 영토를 가진 대국으로 둘러싸여 있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우리가 약할 때는 어김없이 쳐들어 와서 우리의 주권을 유린했다. 근대에 와서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으로 전세계가 분리되었을 때는 미국과 소련은 우리의 영토를 그들의 마음대로 분할하여 동서진영의 대립 완충지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강할 때는 지정학적 이점을 이용하여 중계무역으로 찬란한 역사를 이루어 내기도 하였다. 우리의 국력이 약하거나 강하거나 항상 그 중심에는 인천이 있었다.

 


오늘은 개항 이후 근대문물이 드나들던 흔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인천둘레길 12코스 성창포길을 간다.

동인천역 북광장 - 중앙시장 - 배다리사거리 - 답동성당 - 신포시장 - 홍예문 - 자유공원 - 차이나타운 - 개항박물관 - 제물포구락부 - 삼국지벽화거리 - 인천역

 

 

동인천역은 1899년 9월 18일 우리나라 철도 시작을 알렸던 경인선 개통과 함께 축현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역명의 발음이 어렵다고 역명을 '상인천역'으로 바꾸었다. 해방 이후 일제의 잔재를 없앤다며 잠시 '축현역'으로 바뀌었다가, 1955년 8월 7일부터 현재의 이름인 동인천역이 되었다 그 오랜 철도의 역사를 보여주듯이 동인천역 광장에는 열차가 전시되어 있다.

 

 

 

동인천역 옆에는 시장이 있다. 이곳은 인천의 유도를 처음 보급한 유창호씨가 이곳 송현동 공설시장 개천가에서 야시장을 연 것이 인천 최초의 야시장이 자유시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가 다시 중앙시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오랫동안 미군부대에서 몰래 빠져 나온 군용 물건이나 원조용품, 암달러 등이 많이 거래되었기 때문에 인천사람 사이에서는 양키시장으로 더 잘 통했다. 지금은 결혼 혼수인 예단을 파는 포목점이 많아서 예단시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거리에는 잊혀져 가는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가마솥과 콜렉트콜, CT-2 전화 박스 등 불과 어제 같은데 오래된 옛 일이다.

 


경동사거리에서 신포시장으로 접어든다. 신포동에는 1940년대 후반까지도 닭과 계란을 팔던 닭전이 번성했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농민들은 무, 배추, 파, 마늘 같은 채소만을 주로 생산했기 때문에 당시 인기를 끌던 양파나 토마토, 피망, 연뿌리

같은 채소를 공급하던 청나라 상인들이 꽤나 으스대었다고 한다.

 

홍예문

 

홍예문은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높이 약 13m, 폭 약 7m의 화강암 석축을 쌓고 터널처럼 만든 석문이다. 이 석문은 대한제국 시대에 철도 건설을 담당했던 일본 공병대가 1906년 착공하여 1908년 준공하였다. 당시 인천 중앙동과 관동 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수가 급격히 늘자 만석동 방면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이 홍예문을 뚫었는데 일본인들은 혈문(穴門)이라 불렀다.  이 문 위에 오르면 인천 앞바다와 항구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수목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인천의 지형이 용의 형상으로 홍예문 일대가 용의 허리라서 일본인들이 이 문을 만들어 허리를 끊고 싸리재에 길을 만들어 목을 끊었다고 한다.

 

자유공원


자유공원이다. 70년대 자유공원을 방문하고 처음이다. 그때는 연안부두에서 계단을 올라와 바로 맥아더 동상이 보였던 것 같은데 그때의 모습하고는 다른 듯 보인다. 자유공원은 1883년 인천이 개항된 지 5년 후인 1888년 국내최초로 서구식 공원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만국공원, 또 한 때는 서공원, 해방 후에 만국공원으로 다시 불리다가 1957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의 동상을 세우면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2002년 말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고와 9.11테러 등으로 반미감정이 증폭되면서 외세의 상징인 맥아더 동상은 철거 논란이 있었다. 이에 맞서 동상을 보호하기 위해 자유공원에 경찰병력을 상주시키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알록달록 온 세상이 무지갯빛으로 변했다. 이상한나라의 엘리스가 위에서 내려다 보고 황소가 색동옷을 입고 벤치에 앉아 편안하게 쉬고 있다. 이곳은 송월동 동화마을이다. 송월동은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달의 모습이 아름다워 송월동으로 불린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후에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여 부촌이었으나, 수십 년 전부터 젊은이는 떠나고 노인들만 남고 빈집들은 방치되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꽃 길을 만들고 세계 명작 동화를 테마로 담벼락에 색칠을 하여 동화마을로 변화하였다. 이곳이 송월동 동화마을이다.  낡은 담과 옹벽에는 세계명작동화를 테마로 한 벽화가 그려졌다. 골목길을 따라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의 길’, ‘빨간 모자 길’, ‘엄지공주 길’, 피터팬 속 ‘요정나라 길’ 등 11개의 동화를 만날 수 있다.

 

 


동화마을을 지나자 진시황제 병사와 황제의 계단이 있는 차이나타운이 나타난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3년 인천항 개항 후 1884년 현 중구 선린동 일대가 조계지로 지정된 것에서 유래했다. 이후 1902년 첫 화교 초등학교가 설립되는 등 한국 화교의 주요 정착지로 발전했다. 

 


차이나 타운에는 먹거리도 풍부하다. 온갖 종류의 중국 음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가는 손님들을 유혹한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자장면이 탄생한 곳도 바로 이곳 차이나 타운이다.

 


1960년 당시 이곳 차이나타운에는 4천여명의 중국화교가 거주하고 있었고, 화교 카톨릭 신자들은 답동 성당을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언어소통과 문화적 이질감으로 화교들만의 성당이 필요했다. 이에 미국 메리놀회에서는 1960년 7월 화교를 위한 선린 성당을 설립하고 중국어에 능통한 고요셉 신부를 초대신부로 임명하게 된다. 현 성당 건물은 초대 신부의 노력으로 1966년에 완공된 해안성당이다.

 

대불호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1888년 개항지 인천에 세워진 이곳 대불호텔이다. 경인선 철도가 놓이기 전 인천에서 서울로 가려면 조랑말을 타고서도 한나절이 걸렸다. 1883년 개항한 인천항(옛 제물포)을 통해 조선 땅을 밟은 이방인들은 인천에서 묵어야만 했고, 대불호텔은 이런 수요를 바탕으로 생겨났다. 일본 해운업자가 현재의 인천 중구 중앙동에 세운 이 호텔은 서양식으로 설계된 3층 벽돌 건물이었다.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맞았고, 침대가 딸린 객실 11개와 다다미 240개 규모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생활사박물관


대불호텔 옆에는 생활사 박물관이 있다. 필자가 어릴 시절에 새활의 전부였던 것이 이제는 모두 생활의 역사가 되었다.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


현재 인천개항박물관으로 사용중인 이곳은 1883년 11월에 설립된 인천에서 가장 처음 은행의 역할을 했던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이었다. 일본 도쿄에 본점이 있는 이 은행은 당시 은행원이 가방 하나만 들고 조선으로 건너와서 간단한 업무만 했다.  제1은행은 주로 조선에서 만들어낸 금피와 사금을 싸게 살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수입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었는지 관세 업무도 처리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결국 1984년 2월 제1은행 부산지점장과 조선 총 세무사 뮐렌도르프는 조선3항인 인천, 원산, 부산에서 해관세 취급과 해관 어음 발행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제1은행의 업무와 수입이 점차 증가하면서 정치자금의 거래, 해관세의 취급, 한일양국의 국고 취급에 대한 특허를 받는 중앙 금융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8.15광복 후 이곳은 1980년까지 조달청 인천사무소, 1996년까지 인천지방법원 등기소로 이용되었다. 1998년 이후 상설 의류매장, 인천 문화발전연구소 등으로 이용해오다가, 2000년에 건물을 보수해 중구청의 소관 부서로 쓰였다. 2010년부터는 개항기 인천과 근대 문화를 보여주는 인천개항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 어린 여학생 가이드가 금고로 사용하였던 장소를 설명하고 있다.

 

인천시민애집


옛 시장관사로 사용하던 건물이 인천시민애집이란 이름으로 무료로 개방되어 볼 수 있다. 시장관사를 이렇게 높은 언덕에 지었을까?

 


삼국지 벽화길을 경유하여 인천역을 종착지로 오늘 길을 마무리 했다. 이제 우리나라는 세계 제 7위의 선진국으로 우뚝 섰다. 예전에는 우리의 위상을 실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세계 코로나가 닥치고 러시아와 우크라니아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가 얼마나 선진국인지 실감이 난다. 경제뿐만이 아니라 문화도 전세계가 열광한다. 한국어로 된 K-팝과 영화를 전세계 사람들이 열광하고 우리의 문학작품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런데도 예전의 약소국일 때의 기억을 하는 일부 사람들은 미국, 중국, 일본에 굽실거리며 자국의 지위를 폄하하고 있다.

 


지금 미국의 강달러 정책으로 전세계가 위기에 처해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가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위기가 될 수도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어려운 시기를 잘 버텨나가 전세계에 더욱 더 우리의 위상이 드높여 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