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 중의 하나인 의주길은 한양과 평안도 의주를 잇는 길이다. 이길을 따라 가면 평양과 의주를 거쳐 중국의 연경까지 갈 수 있다.
그 의주길의 첫 길은 지하철 3호선 삼송역 8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벽제관길이다. 벽제관길은 서울에서 대륙으로 향하는 첫 길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길을 따라 멀리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을 배웅했고,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영접했다. 또한 7.4 공동성명 때에는 남북한 지도자들이 이길을 따라 평양과 서울을 오갔으며, 12.12 군사정변 때에는 전방에서 출발한 9사단 29연대,30연대 병력과 2기갑 16대대의 전차병력이 서울로 진입한 곳도 이곳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이 강산을 우리 힘으로 막아낼 힘이 없었다. 결국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왕은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주를 했다. 더 나아가 왕 선조는 명에게 대신 이나라를 지켜달라고 애원했다. 명은 우리나라를 돕고자 한 것이 아니라 왜가 대륙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고자 원군 이여송을 파병했다
평양전투에서 대승을 한 이여송은 밀려나는 왜적의 뒤를 따라 개성까지 들어왔다. 승리에 도취한 이여송은 한양을 한꺼번에 수복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임진강을 건넜다. 단숨에 이 곳까지 내달은 이여송은 이 곳 여석령 숯돌고개에 매복해있던 일본군 선봉인 고바야가에 의해 크게 패한다.
사진의 숯돌고개는 이여송이 훗날 복수를 다짐하며 이곳에서 자신의 칼을 갈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사실 이여송은 복수는 커녕 이때부터 조선을 구원할 의지를 잃고 군사를 다시 평양까지 후퇴시켰다.
목적지인 벽제관지로 가기 위해 작은 언덕을 지나간다. 언덕길에는 수많은 쑥부쟁이가 고개를 내밀고 벌과 나비를 유혹한다. 미세먼지가 없이 모처럼 깨끗한 하늘에 흰색 물감이 수채화를 그린다.
연경으로 가는 길가에 김지남의 묘가 있다. 김지남은 조선 후기(1654~1718)의 역관이다. 19세에 역과에 급제한 후 숙종 말년까지 외교관으로서 많은 업적을 쌓았다. 김지남은 휼륭한 역관이기도 했지만 청나라와의 국경문제를 해결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1712년 숙종 때에 백두산 인근의 국경을 두고 청나라와 외교 문제가 불거지자 김지남은 청나라 사신과 담판을 지어 간도와 토문강 동쪽이 조선의 영토로 매듭짓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또 청나라에 간청하여 바치는 조공을 크게 줄였음은 물론, 학문과 저술에도 힘을 썼다. 1682년(숙종 8) 통신사 일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서 쓴 『동사일록』, 1690년(숙종 16) 신이행(愼以行)·김경준(金敬俊)과 공동으로 편찬한 중국어 사전인 『역어유해』, 1698년(숙종 24) 청의 화약 제조 비법을 소개한 『신전자초방』, 1712년(숙종 38) 청나라 목극등과 함께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기록인 『북정록』, 1718년(숙종 44) 아들 김경문과 함께 쓴 사역원(司譯院)의 연혁과 구성, 중국 및 일본과의 외교 관계 등을 자세히 소개한『통문관지』가 그것이다. 그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한 때 숙종이 높은 벼슬을 제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은 중인 신분인 역관에게 동서반 실직의 제수는 부당하다고 반대해 외직인 문성첨사에 임명되었다.
김지남은 죽어서도 이 곳 의주길 옆에 무덤을 썼다. 그것은 명분만 내세우는 근시안적인 눈을 가진 최고위 신분의 관리들과 역관들에게 자신의 무덤을 보고 외교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기 위함이었다.
북한산의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한양과 고양시에서 태어나서 자라난 젊은이들은 항상 북한산을 바라보며 이상과 포부를 가졌다. 그러나 지금은 빌딩의 숲에 가려 북한산을 바라볼 수 있는 지역이 한정적이다.
벽제천에는 왜가리들이 한가롭게 날고 길 옆에는 옥수수가 탐스럽게 열려있다.
이곳 벽제관은 1625년(인조 3)에 지은 객관이다. 중국의 사절들은 한양을 오갈 때 항상 벽제관지에 머물렀다. 사신들은 한양에 입성하기 하루 전에 벽제관지에서 숙박을 하고 다음날에 예의를 갖추어 입성했다. 조선 초기에는 제릉(태조비)에 국왕이 친히 제사 지내러 가는 길에 국왕의 숙소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하여 일부가 헐렸고, 6·25동란 때 모두 불타 지금은 관사의 윤곽과 터만 남아 있다.
대륙으로 향하는 의주길은 역사의 길이다. 가는 곳곳이 우리의 역사가 서려있다. 그리고 수많은 우리의 조상들의 애환이 녹아있다. 그 길을 걸었다. 이제는 이 땅에 비극이 사라지고 밝은 미래의 태양이 뜨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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