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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길

의주길 2길 고양의 옛 관아 고양관청길

의주길의 두 번째길은 고양관청길이다. 고양관철길은 벽제관길의 종착지인 벽제관지에서 시작한다.  벽제관지는 조선시대 성종때 세운 중국사신의 공용 숙박시설이 있던 곳이다.  6.25전쟁으로 폐허로 변한 벽제관은 지금은  표석만이 그 위치를 안내하고 있다.


벽제관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고양향교가 있다. 고양향교는 조선에서 설립한 지방교육기관으로 중, 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담당했다. . 조선의 마을 곳곳마다 있던 향교에서는 시와 문장을 짓는 사장학과 유교의 경전 및 역사를 가르쳤다.  철저히 성리학을 통치철학의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은 이 향교를 통하여 양반중심의 철저한 신분제의 사회기반을 더욱 확고히 했다. 

향교 바로 옆에는 중남미 문화원이 있다.  ​이곳에는 30년 동안 코스타리카,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에서 외교관생활을 오래한 이복형 원장부부가 수집한 3,000여 점의 중남미문화유산이 모여있는 곳이다. 박물관에는 중남미의 대표적 문화인 마야, 아즈텍, 잉카유물 등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고, 미술관에는 중남미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그림과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향교의 뒷편으로 돌아가면 대자산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대자산은 대자동과 고양동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해발 210m의 야산이다,  대자리의 명칭은 세종대왕의 아우인 성녕대군이 어린 나이에 요절하자 부친인 태종이 현 대자동에 대자사(大慈寺)를 짓고 마을의 이름을 대자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자산 중턱에서 멀리 북한산이 웅장하다.​

 

산 중턱에 오르면 고려 말의 충신 최영의 무덤으로 가는 표지판이 있다.


고려 말 당시 요동은 권력의 공백지대였다. 공민왕 집권기에도 두 차례 요동을 정벌했고, 이성계도 여기에서 공을 세웠다.  당시에는 명 역시 아직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고 요동에는 관심이 적었다. 이 절호의 기회에도 정도전은 성리학을 숭상하는 양반들만의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 변방출신인 이성계에게 위화도회군을 강행하게 했다.  그리고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는 국토를 확장하여 고려의 부흥을 원했던 최영과 고려의 충신들을 제거했다.


'내가 평생에 탐욕스러운 마음을 가졌다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의 무덤에는 1970년대까지 풀이 나지 않았다.

 

중부대학교

 

1994년 11월 고양시 대자동에서 발견된 비석에는 14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禁標內犯入者 論棄毁制書律處斬 
금표내범입자 논기훼제서율처참

이 금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왕명을 어긴 것으로 보아 처벌한다는 뜻으로 연산군이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폭군 연산군은 자신의 유흥을 위해 사냥터에 사는 주민들을 모두  철거시켰다.

우리나라는 원래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단군의 홍익인간의 나라였다. 그러나 성리학의 국가 조선은 오직 왕과 양반만의 나라였다.  양반을 제외한 모든 백성은 개돼지 보다 못하게 취급 받으며 힘든 생을 감내해야 했다.

▲ 혜덕사

혜덕사는 조선 태종의 7남인 은령군으로부터 삼세에 이르기까지 여덟 명의 신주가 보관되어 있는 사당이다. 일반 백성들은 걸어가기도 힘든 산비탈에 누워있는데 나라에 전혀 기여하지 않은 왕족과 양반들은 죽어서도 드넓은 토지 위에 호화스런 사당 안에서 이렇게 우대 받고 있다.  저승길에서도 조차 신분의 차별은 없어지지 않은 것이다.

​고양관청길은 고양의 옛 관아 자리인 고읍마을을 지나는 길이다. 고양군청은 원래 지금의 서삼릉 부근에 있었다. 그곳에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의 능이 들어서면서 고양군청은 이곳 고읍마을로 옮기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80년 동안 이 지역은 고양군의 행정중심이자 고양과 파주를 잇는 중요한 길목이 되었다. 그 후 1625년에 고양군청 관아는 지금의 벽제관 부근으로 옮겨진다.

 

관청령을 넘어 파주로 간다.  파주로 가는 고개에는 가도가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관청령을 넘어서면 용미리 공동묘지가 나온다.  저마다 무수한 사연을 간직한 수많은 주검들 사이에서 인생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


우리는 저 들꽃처럼 이유도 모른체 이 땅에 태어났다.

 

쑥부쟁이로, 범부채로
때로는 이름없는 들꽃으로,​

그러나 저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햇볕과 알맞은 온도, 알맞은 비와 수많은 벌과 나비의 도움이 필요했을까?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비록 오늘이 고달프더라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나를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위해서 보다 더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야 한다.​

고양관청길의 목적지인 용미3리 용미교에 왔다.  얼굴과 온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하지만 나의 앞에 길이 있는 한 계속 걸을 것이다.  걷고 보고 느끼는 가운데 행복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