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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누리길

양평 물소리길 1코스 문화유적길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

모두가 일을 시작하는 월요일
경의중앙선을 타고 길을 떠난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초겨울 아침의 양수역에서

 

양평 물소리길을 따라
홀로 걷는다.

들판엔 아직 서리가 녹기도 전인데
농부는 어깨에 볏집을 메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길가의 나무들은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푸르던 들판은
갈색의 옷을 갈아입고
겨울을 맞는다.


평범하던 길이
갑자기 가팔라진다 싶더니
길은 금새 다시 완만한 지형으로 변해 걸을만하다.

모두가 계절에 변화에 스스로 몸을 낮추는데 저 소나무들은 무슨 배짱으로 독야청청하는지.

정찬손의 묘

야산을 넘자 커다란 능이 보인다.

정찬손의 묘다.

정창손은 조선초 청백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시대의 유교적 도덕률에 충실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아무런 이유없이 위화도회군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까닭에 명분이 필요했다.

명분은 백성들에게는 비대해지고 타락한 불교를 억압하고,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인정받고, 중국으로부터는 유교를 국교로 하고 스스로 신하의 나라임을 강조하여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이 어쩔 수 없이 택한 일종의 전략적 이념이었다.

그러나 세대가 지난 어느 날 그 이념은 정념이 되고 시대의 도덕률이 된다. 무조건 중국에 대하여 사대하고,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의 원칙에 따라 현재의 왕에 충성하는 것이 시대의 최고의 도덕률이 된다.

정창손도 그랬다.

우리만의 글인 한글창제를 끝까지 반대하다 투옥당하고, 다시 복직되어서는 불교숭상을 반대하다 다시 좌천되었다. 세조 때는 단종 복위를 함께 논의한 동료들을 세조에게 고변하여 최고의 관직까지 올랐고, 성종 때는 연산군의 생모를 폐출하는데 앞장섰다. 그 결과 그는 갑자사화에 연류되어 부관참시를 당하나, 시대의 이념의 충실한 청백리로 녹선되어 시대의 사대부들에게 추앙되었다. 그는 미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시대의 이데오르기와 도덕률에 최고로 충실했다.

무조건 시대의 이념과 도덕률에 충실한 것과, 최고의 선을 지향하고 미래를 내다보고 행동하는 것, 둘 중의 어느 것이 최고의 충신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인물이다. 


물소리길은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이다.

돌틈사이로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노라면


그 물소리사이로 청동오리등

겨울철새도 만나고

다양한 모양의 다리도 만난다.

 


곳곳마다 겨울나기를 위해
시래기도 말리고
김장김치를 가득채운

장독대도 만난다.


맑은 샘물안에서

아득히 먼 곳의
또하나의 세계를 본다.

이덕형 신도비

이덕형 신도비다.

이덕형하면 떠오르는 것이 어린 시절 교과서에 나오는 '오성과 한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오성 이항복과 함께 기발한 장난으로 권위를 내세우는 어른들을 놀려먹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명나라에서 온 사신도 도리에 어긋나면 만나주지 않았다. 백성을 위해서는 전쟁터의 적진에 단신으로 들어가 적장 고니시를 만나려고 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명나라 제독 유정과 조선의 제독 이순신과 함께 순천에서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했고, 행판중추부사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체찰사를 겸해, 전란 뒤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였고, 대마도정벌을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광해군 때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이덕형을 모함하며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이 관직을 삭탈해 처형을 면하게했다.

우리는 이런 분들을 위인이라 부른다.


물은 흘러 온갖 근심 떠나보내고
구름은 복록따라 일어난다네.
운길산은 중은동에 이웃해 있고
용진은 월계와 접해있네
골짜기에 만발한 복사꽃 덤불
나그네 삶이러니 언제 또 볼까

 한음 이덕형의 시비 앞에서
고향을 떠나온 나그네의 향수가 전해진다.

 


겨울의 따사로운 햇빛 아래에서도
새벽내내 맺혔던 서리는 쉬 녹을줄 모른다.


청계산과 부용산을 사이에 둔 고갯길에
노루 두 마리가 나를 쳐다보고는
저멀리 달아난다.


북한강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청계산과 부용산 고개길에 서면

속세의 모든 번뇌는

물안개가 되어 사라진다.

여운형 생가

여운형 생가가 눈 앞에 보인다.

김구선생과 함께 우리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에 일생을 바친 민족 지도자 여운형!

그는 왕이 아닌 국민이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 수립을 원했고, 일본이 국권을 침탈하여 서슬 퍼런 시기에 선생은 서울 밖에서 최초로 광동학교를 설립하여 인근 학생들에게 역사, 산술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또한 1918년 프랑스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대표를 조선의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대규모 궐기대회를 추진하기로 결심하기도 했다. 또한 1919년 만주 지린성의 대한독립선언, 도쿄유학생의 도립선언, 3.1독립선언의 배후인물이기도 하다. 손기정 선수에게 올림픽 마라톤에 나가 조선의 위상을 보여주라고 독려했으며, 국내최초로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소식을 전했다. 선생은 조선이 해방되자 연합군에게 조선의 치안권을 받았다. 그는 해방 이후 줄기차게 남북통일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그를 시기하는 정치세력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만다

몽양 기념관

남북한 모두에게 존경받던 인물 여운형!

그를 만나기 위해 몽양기념관을 찾았지만 정기휴관일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어록길에 몽양선생이 남긴 수많은 어록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날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며 샹존권은 신성한 것이다. 시대의 조류는 조만간 인간세계의 여러 모순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서둘러 리 과거의 껍데기를 벗지 못하면 국가도 개인도 이내 망하고 말 것이다.' (1908)

'이제 우리민족은 새역사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을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이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해야 한다.' (1945)

'만일 자기의 공만을 내세우고 자기의 주장만 고집하여 독선적 배타적으로 한다면 민족통일은 정대로 불가능하고 이 기회를 놓쳐 천추의 한을 우리나라 역사에 남기게 될 것이니 이점을 절대로 삼가야 될 것이다.' (1945)

몽양 어록을 읽으며 걷다보니
어느새 신원역에 다다른다.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문화유적숲길
물소리길 1코스

아무도 없는
혼자 걷는 그 길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