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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범일동 이중섭거리 - 자유로운 영혼 이중섭

나는 그림을 잘 모른다. 그러나 화가 이중섭은 기억한다. 마치 이중섭의 영혼을 닮아 무언가 한이 서려있는 모습으로 붉은 빛 황혼에 울부짖는 눈망울로 무언가를 응시하는 황소그림과 가족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는 자신을 담뱃갑 속 은지화에 그린 그림도 떠오른다.

의지는 삶이다. 본능의 욕구를 극복하고 더 높은 단계의 의지를 가질수록 삶은 위대하다. 인간답게 잘 산다는 것은 그 어떤 강요를 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이상을 마음대로 표현하며 마음이 시키는 자유의지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인간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화가 이중섭도 그랬다. 일제시대에 대부호의 삼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창작활동을 하지 말고 사상에 관련된 그림을 그리라고 하자 국군과 함께 자유를 찾아 남하했다. 그리고 통영의 한 부호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의지 대로 살기 위해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다가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나이 사십에 생을 마감했다.


임종이 외롭다기 보다,
살림살이가 고달프다기 보다,
세상사람들이 야속하다기 보다,
자네는 자네만 아름답게 살았고
좋은 그림을 남기고 가면 그만이라는
그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너만이 착하고 아름답고
너만이 좋은 그림만 그린 것이
우리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너같이 너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려는 놈은 죽어야 마땅해...

- 이중섭을 화장하며 박고석이 남긴 글

나는 이중섭이 한국전쟁 중 일본인 아내 마사코와 아들 둘과 피란 생활을 했던 범일동 이중섭 거리에 간다. 범일역에서 내려 범일시장 골목을 지나 이중섭 거리로 간다. 영화 친구의 촬영지였던 법일동은 지금도 판잣집들이 즐비하여 마치 한국전쟁 이중섭이 살던 그 시대를 다시 보는 듯하다.

길에는 담배를 물고 무엇인가 상념에 잡혀 고뇌에 가득 차 있는 이중섭과 그의 싸인 'ㅈㅜㅇㅅㅓㅂ'과 함께 이중섭에 대한 글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나는 아무도 없는 한적한 거리에 하나 하나 그 글귀를 정독하며 점점 이중섭의 세계로 빠져든다.

내가 만난 이중섭
김춘수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뼘 한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았다고.

이중섭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미쳤다. 아홉 살 때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무덤 안에서 잠을 자며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고, 스무 살에는 민족학교인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미술에 대한 집중적인 지도를 받았으며 주기용, 김기석, 함석헌 등으로부터 전인교육을 배웠다.


스물 다섯에는 화가가 되기 위해 데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동경문화학원으로 옮겼다. 이 시기에 학교 후배인 마사코와 그림이 인연이 되어 숙명처럼 만난다.


1943년 봄 화가가 되어 원산으로 귀향, 다음해 야마모토 마사코와 원산에서 결혼하고 8월 해방을 맞이한다.


그러나 일본인 아내 때문에 친일파로 치부되고 그림도 자유롭게 그릴 수 없어 괴로워했다. 전쟁이 터지고 형이 행방불명이 되고 집은 폭격으로 부숴지자 가족과 조카를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했다. 잠시 몇 개월 동안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건너 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옮겨와 범일동에서 판잣집을 얻었다.


1952년 대한민국 종군화가단에 가입했고 삼일절 경축미술전에 출품하였다. 곤란이 계속되어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곧 일본의 친정으로 떠났으며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 편지가 시작되었다.


1952년 박고석, 한묵 등과 기조동인을 결성하고 르네상스 다방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953년 오랜 고난 끝에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을 건너갔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통영으로 가서 제작에 몰두하여 <달과 까마귀><떠 받으려는 소><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 등 여러 작품을 완성하여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하고 통영일대를 다니면서 풍경화 제작에 몰두하여 <푸른언덕><충렬사의풍경> 등을 그렸다. 이 무렵 통영 부호의 제의가 들어오지만 완곡히 거절하고 외롭고 배고픈 예술가의 길을 묵묵히 택했다.


평양부호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자라서 일본인 아내를 맞고 오직 그림창작만의 열정으로 굴곡의 삶을 살아낸 그의 내면은 남모를 고통과 자학으로 피폐해지고 있었다.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다시 음식을 거절하기 시작, 극심한 간염으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 한달 후인 1956년 9월 6일 40년의 짧은 숨을 거두었다.


3일 뒤 그의 죽음을 안 친구들이 장례를 치르고 화장한 뼈의 일부를 공동묘지에 다른 일부는 일본의 부인에게 전해져 집 뜰에 모셔졌다.

 벽면에 가득히 채워진 미술만을 위해 살다 간 이중섭의 일대기를 천천히 읽고 또 읽었다. 참으로 인간다운 너무나 인간다운 삶이다. 의지의 삶이다. 벽면마다 이중섭의 황소그림과 은지화들을 이 시대의 화가들이 모사하여 걸려있다. 그 미술품 들을 하나 하나 감상하니 마치 내가 미술관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다.

 까득히 높은 범일동의 계단에 질곡의 인생을 살다간 이중섭이 웃고 있다. 아무도 없는 이곳 희망길 100계단에서 내게는 실제 이중섭의 영혼이 살아서 웃고 있는 듯 그렇게 느껴진다. 평소 본인이 좋아하는 그림의 삼매경에 빠져있을 때 이중섭의 영혼은 아마 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중섭의 영혼 속을 향해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간다.

계단 중간에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두 명의 아들과 아내가 소 달구지 위에 앉아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 소는 흥이 난 듯 발걸음도 가볍고, 이중섭 자신은 고개가 꺾어질 정도로 그 가족과 함께 너무나 즐거워하는 모습의 그림이 그의 편지 글보다 더 가족의 그리움이 느껴진다.


..야스카타에게..
나의 야스카타, 잘 지내고 있니? 학교의 친구들도 모두 잘 지내고 있니? 아빠도 건강하게 전람회 준비를 하고 있어. 아빠가 오늘 '엄마, 야스나리, 야스카타를 소 달구지에 태우고 아빠는 앞에서 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나라로 향해가는 그림을 그렸어, 소 달구지 위에 있는 건 구름이야, 그럼 안녕..
아빠 중섭

아빠가 사다 놓은 종이가 떨어져
한 장 밖에 없어서
그림을 한 장만 보낸다.

엄마와 태성이 태현이
사이 좋게 봐 다오.

이중섭은 그릴 종이를 살 돈도 없어서 담뱃갑 속 은지에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여관방을 전전하며 은지에 그린 그림으로 대구 미국문화원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당시 미국문화원 책임자 맥타카트는 은종이 그림 세 점을 뉴욕 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다.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았으나 은종이 그림은 폐지를 이용한 그의 독창성을 인정받아 동양인 최초로 상설전시가 되어 세계적 화가로 승인 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은지에 그린 그림이 세계적 화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니 아이러니 하다.

이중섭은 가족을 죽도록 보고 싶어 했다. 아내를 미치도록 그리워했다. 바로 코 앞에 현해탄만 건너면 그리운 가족과 사랑하는 아내가 있건만 그는 그림을 위해 자신의 본능을 잠재웠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온통 가족뿐이었다. 그리움이 뚝 뚝 묻어나는 그의 편지와 청색날개의 수탉과 홍색날개의 암탉이 감격적인 재회의 찐한 키스를 하고 있는 그림. 온 세상을 휘감을 듯 환희의 차고 행복한 모습의 두 마리의 새는 이중섭과 마사코의 만남과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중섭은 소를 특히 좋아했다. 그림에 몰두할 때면 며칠씩 화실에서만 지냈고 작업이 끝나면 소재를 찾아 다녔다. 하루 종일 소만 관찰해 소도둑으로 몰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인지 이중섭이 그린 소를 보고 있노라면 이중섭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어느 황소 그림은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을 이루지 못한 한이 서려있는 듯 하고 어느 그림은 그 한이 터져 분노에 차 울부짖고 저돌적인 모습이 보인다. 실제 저 동상에 있는 저돌적인 황소의 그림의 가격은 얼마나 될까? 저 황소 그림은 2010년 서울 옥션경매에서 35억6000만원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낙찰자가 35억 6000만원에다가 낙찰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소 달구지를 타고 행복의 나라로 떠나는 이중섭의 가족 그림인 ‘길 떠나는 가족’의 그림을 경매자에게 넘겼으니 그 그림 값까지 더한 가격이 실제 낙찰가로 봐야 할 것이다.

희망계단의 끝 이중섭 전망대에서 이중섭이 질곡의 삶을 살았던 범일동을 바라본다. 초고증 아파트에 가로막혀 빛까지 차단된 수많은 판잣집,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담뱃갑 속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는 이중섭이 보인다.

 

그 속에서 이중섭을 추억한다.
범일동 이중섭 거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