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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영도대교 - 영도다리~ 거서 꼭 만나재이~

수많은 사람들이 영도다리 밑에 모였다.
확성기에는 피난민들의 한이 서린 애절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데로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영도대교 유라리 광장!

수많은 인파들 사이로 피난 보따리를 사람들이 애가 타는 표정으로 정지되어 서 있다.


영도다리! 거~서 꼭 만나재이~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했건만 이렇게 꼼짝 않고 서 있는 것을 보니 아직도 못 만난 모양이다.

세월이 아득히 지난 지금 영도다리 위에는 그날의 기억도 까마득히 잊은 듯 일상에 바쁜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때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고 다리 위에 사람들과 차들은 온데간데 없고 다리 밑에는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한다.

 

정확히 오후 2시

다리 위 통행이 모두 차단된 지금


서서히 영도대교의 상판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환호를 지르며 이 순간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는다.

 

영도대교는 동양 최초, 국내 유일한 대규모 단엽식 도개교다. 1934년 11월 23일 영도대교가 처음 올라갈 때에는 그 광경을 보려고 양산, 김해, 밀양, 진주, 산청, 거창 등지에서 6만 명의 인파가 이곳 부산에 몰려들었다. 거대한 다리가 선박이 통과하기 위해 올라가도록 만들었다는 발표를 아무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도대교는 일제가 조선 찬탈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기에 이것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하지만 이 다리를 만들기 위하여 대한민국 노동자 43만 여명이 투입되었고 사망자도 17명, 중상자 41명까지 발생되었다. 또한 영도대교의 역사적,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보존해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입장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난민의 애환이 서린 결정체이므로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보존해야 하고, 향후 만남의 장소로도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기에 복원 및 확장하여 2013년 11월 27일 재개통하기에 이르렀다. 영도대교 첫 개통식이 열렸던 1934년 이래 79년만의 일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참으로 다행이다. 영도다리는 6.25 한국전쟁의 아픔을 같이한 서민들의 삶과 한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근대사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가혹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이 다리 위에서 투신 자살을 했고,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은 “부산 영도다리 밑에서 만나자”는 약속의 말을 남기고 전쟁의 포연 속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영도대교에서 절망했고, 재회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이렇듯 영도대교는 한국의 현대사, 부산의 민중사에 있어서 의미가 깊은 존재였다.


다시 그 소리가 들려온다.


영도다리! 거~서 꼭 만나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