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4일, 정발 장군이 전사하고 부산진이 왜적의 손에 떨어졌다. 다음날 왜군 선발대가 동래성에 와서 송상현 부사에게 목패를 보였다.
전즉전의불전즉가도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즉시 길을 비켜라.
송상현 부사는 눈을 부릅뜨고 목패를 던져 답신을 했다.
전사이가도난
戰死易 假道難
싸워서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수많은 왜군이 동래성을 공격했다. 경상좌병사 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흥은 적군의 기세에 눌려 도망가고 송상현 부사, 조영규 양산 군수 등 몇 명의 관리와 백성 4천명만이 남았다. 왜군들은 동래성를 겹겹이 에워싸서 벌떼처럼 몰려들어 총공세를 퍼부었다. 1만 5천명 왜군의 조총에 맞서 병사들과 동래성의 백성들은 끝까지 대항했다. 병사들은 활과 화살로, 백성들은 칼, 낫, 곡괭이와 돌멩이로 적과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동래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부하들은 송상현에게 급히 피할 것을 권했지만 송상현 부사는 피하지 않았다. 적들이 보는 앞에서 임금과 아버지에게 예를 표하고 단정히 앉아 시를 쓴 후 적의 칼에 장렬히 쓰러졌다. 동래성이 함락된 후 왜군들의 무지막지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힘없는 어린 아이와 부녀자를 뒤에서 잔인하게 살육하고 입에 담지 못할 만행들이 저질러졌다. 동래에서 발견된 어린아이와 아녀자들의 유골에서 그때의 잔인함이 그대로 나타난다.
그 역사를 알기 위해 동래부 동헌을 찾았다. 동헌은 조선시대 수령의 집무공간으로 관아 건물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마당에는 죄인들을 심문하던 형틀이 보인다. 순리를 거스르고 정도를 벗어난 사람들이 이곳 형틀에 매달려 심문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앞에는 조선시대 동래부사가 공적인 업무를 보던 충신당이 보인다.
동래는 일본과 가장 접경에 위치해 있는 한반도 제일의 관방이자 전략요충지로서 조선 태조부터 진을 두고 병마사가 판현사를 겸하도록 하였고 명종 때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어 정3품 당상관을 부사로 임명했다.
충신당 건물에 들어서자 동래 동헌의 옛 모습과 함께 어린 시절 국사 책에서 보았던 이름들이 보인다.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고경명, 고니시의 수많은 왜군에 맞서 동래성을 지키다 송상현,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 모두 이곳 동래부 동헌에서 동래부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역사 속 걸출한 인물이 3명씩이나 동래부 동헌에서 근무했다.
동래부 동헌에서 1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에 충렬사가 있다.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절한 부산의 순국선열의 영령을 모신 곳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전국시대를 무력으로 통일한 히데요시가 정권의 안정과 영토욕을 채우기 위해 일으킨 침략전쟁이다. 300여년동안 전쟁이 없이 평화만 유지해 온 조선은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로 무장하고 몰려오는 왜적을 막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열은 의연한 기개로 적과 싸우다 최후를 맞았다.
1605년 동래부사 윤훤에 의해 동래읍성 남문 안에 충렬공 송상현을 모신 송공사가 세워졌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1624년, 1709년, 1736년 그리고 현재까지 증·보수를 계속하여 충렬공 송상현, 충장공 정발, 함께 전사한 양산군수 조영규, 부민, 김상 등의 위패를 이곳 충렬사에 모시고 매년 5월 25일 시민들의 정성으로 제를 올린다.
임진왜란 당시 그들이 싸운 역사의 현장을 보기 위하여 동래읍성을 향한다. 스마트폰의 지도를 따라 길을 걷다가 길이 막혔다. 언덕 위에 세워진 학교들 너머에 동래읍성이 있다.
바로 몇 미터 앞에 눈에 보이는 성을 보고 뒤로 돌아서 갈 수 없다. 학산 여자고등학교에 종사하시는 분에게 학교 너머로 갈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원래 여학교에는 일반인이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지만 특별히 후문을 통해 갈 수 있게 해주겠다며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덕분에 학산 여자고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후문을 통해 동래읍성에 들어갔다.
이 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중심지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 형식으로 성을 쌓았다. 삼한시대 이후 동래에는 독로국 등으로 불리는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때 성을 쌓았으리라 짐작된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그때의 짐승처럼 달려드는 무자비한 왜군에 맞서 죽음을 예상하고 싸우는 처절한 동래읍성의 아녀자와 농군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군사요충지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이후에도 이 성은 한동한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731년 영조 7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 그때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 및 암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을 지희루, 서문을 심성루, 남문을 무우루, 암문을 은일루라 하였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과 뒤쪽에 주조문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3문에도 읍성을 부설하여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에 의해 시가지 정비계획이라는 이름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었고 현재에는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 인생문,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 여장 등이 부분적으로 보수 중이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 것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 득이 없는 살육이 난무한 전쟁! 그것은 대부분 몇몇 위정자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일어난다. 때로는 국내의 갈등을 외부로 돌리기 위하여, 때로는 자신의 통지지역을 더 넓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때로는 현재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자원을 강탈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념, 종교, 경제, 인종, 차별 등 다양한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킨다. 그 결과 대부분의 전쟁은 대량살상에 의해 아무런 이득도 없이 참혹한 결과만을 남긴 체 종결된다. 오직 평화만을 추구했던 선량한 백성들이 오직 한 사람의 정권욕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생을 송두리째 버려야 했던 동래읍성의 수많은 이름없는 선열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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