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가면 이기대 해안산책로는 꼭 보고 와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부산의 최고의 절경이라는 말이다. 이기대 해안 산책로는 해안 절벽을 따라 조성되어 있어 숲과 절벽과 바다의 아름다운 절경을 감상하기에 그만이다. 이기대란 이름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수영성을 함락시키고는 축하잔치를 베풀었는데 수영의 두 명의 기녀가 술 취한 왜장과 함께 물 속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이기대 산책로는 총 길이 3.95킬로미터로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농바위, 이기대를 거쳐 동생말에 이르는 코스다. 한가지 조언을 하자면 동생말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오르막 경사가 없는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시작하는 것이 트래킹에 편하다.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시작하면 처음에만 경사가 있다가 줄곧 내리막 길이다. 내가 이 길을 걸을 때는 공사구간이 많아서 우회하느라 3.95km가 아닌 5.4km 정도를 걸었다.
첫 출발지인 오륙도 하늘공원 바로 옆에 오륙도 스카이워크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의하면 이곳의 옛 지명은 승두말이다. 승두말은 말안장처럼 생겼다고 생겨난 말로 지역주민들은 잘록개라고 불렀다. 바다를 연모하는 승두말이 오륙도 여섯 섬을 차례대로 순산하고 나서 승두말의 불룩했던 부분이 잘록하게 들어가 선창나루와 어귀의 언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동해와 남해의 경계지점이기도 한 이곳은 해파랑 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스카이워크에 오르니 발 아래 널찍한 투명유리가 펼쳐져 있다.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 그곳을 걷는 사람들은 발 아래 넘실거리는 파도를 바라보며 유리가 깨질까 조심조심 걷는다.
이기대산책로의 출발점인 해맞이 공원에 오른다. 봄이면 이곳에 유채꽃이 만발하여 또 하나의 절경이라고 하는데 유채꽃은 없었다. 그러나 서울과는 달리 동지섣달인 지금도 푸른 풀들이 가득하고 군데군데 꽃도 피어있다.
해맞이 공원에 오르니 바다내음이 물씬 풍기는 바람이 불어온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오륙도를 바라본다. 오륙도는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되어 이렇게 부른 이름인데 이곳에서 남동쪽 바다를 바라보니 섬들이 줄지어 있어서 그런지 내 눈에는 두 개의 섬뿐이 보이지 않는다.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바다를 바라보니 하늘과 바다와 바위와 나목(裸木)이 어우러져 보이는 것마다 절경이다.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한 참을 바라보니 어느새 두 개의 섬뿐이 보이지 않던 오륙도도 하나, 둘 숨겨진 자태를 드러내 보인다.
농바위다. 농(籠)이라는 것은 버들채나 싸리 따위로 함처럼 만들어 종이를 바른 궤를 포개어 놓도록 만든 가구를 말한다. 농바위란 마치 농을 올려놓은 듯 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제주 해녀들이 남천동 해안가에 자리를 틀고 해산물을 잡으면서 해안가 바위들을 연락수단으로 삼기 위해 농바위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태평양 저 멀리에서 현해탄을 건너와 부딪치는 하얀 파도에 맞서 꿋꿋이 버텨 온 바위 위에 낚싯대를 드리운 채 세월을 낚는 강태공들이 한 폭의 그림같이 보인다. 어느 화가가 이보다 더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린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 채찍질 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유치환의 ‘바위’처럼 파도와 바닷바람에 깎이어 억겁의 세월을 견디었을 바위와 나무들, 수 만년의 역사가 쌓인 땅을 밟고 아득히 멀리 보이는 해운대와 광안대교를 바라보며 길을 걸어서 널찍한 바위들이 펼쳐져 있는 어울마당을 지나 이기대에 다다른다.
이기대 주변의 넓은 바위 위에는 마치 누군가 일부러 동그란 원형으로 찍어 놓은 것처럼 커다란 웅덩이가 있다. 이것은 바위의 틈에 있던 자갈이나 모래가 파도에 의해 회전하면서 오랜 시간 바위의 틈을 깎아 만든 돌개구멍이다.
멀리 광안대교와 해운대에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빌딩들! 그곳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각의 시각도 아까워하며 월,화,수,목, 금, 금, 금, 돈을 좆아 바삐 움직인다.
누군가 말했다.
시간은 아끼면 아낄수록 나에게 주어지는 온전한 시간은 줄어들고, 살려고 바둥거리면 거릴수록 사람답게 사는 시간은 더 줄어들 것이라고. 지옥과 같은 삶에서 탈출하려고 하면 할수록 삶은 더 지옥같이 힘들고, 고난을 극복하려면 극복할수록 삶은 고난의 연속이라고. 반대로 시간을 풀어두면 풀어둘수록 자신의 시간은 늘어나고, 삶에서 잠깐만 벗어나 주변을 돌아보면 삶은 더 아름다워 진다고. 지금 보는 풍경이 아름다운 것은 지금 바라보는 모든 것이 나의 이해타산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금 바라보는 것에 어떤 욕망이 부여되는 순간, 그 아름다움은 곧 사라질 것이라고.
나도 한때는 새벽 세 시부터 자정이 넘어서까지 일에 매달리며 치열한 삶을 살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고 생존경쟁의 그 삶의 시간을 버렸다. 가지고자 하는 모든 것을 비우고 나니 모든 것이 자유로워졌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않지만 마음만은 여느 때보다 풍요로웠다. 그리고 지금처럼 홀로 두 발로 여유를 즐기며 아무 이해타산도 없이 이렇게 산책로를 걸을 수도 있었다. 자연의 모든 것이 나의 정원이고 내가 잠시 걸터앉는 곳이 나의 집이다. 그 바라보는 모든 것은 나와 아무런 이해타산도 없다.
그리고 지금 홀로 아무런 걱정도 없는 상태에서 멋지고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는 있다. 그 누가 나보다 더 행복할까?
통 속에 앉아 알렉산더 대왕에게 그늘을 지게 하지 말라고 호령했던 디오게네스처럼 이렇게 홀로자아도취에 흠뻑 빠져 길을 걸으니 이미 해는 서산에 기울고 발걸음은 종착지인 동생말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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