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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진주성 - 진주목사 김시민과 논개

진주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진주대첩의 진주목사 김시민과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다. 오늘 그 역사의 인물이 있는 진주성에 간다. 진주성 입구에 공북문이 보인다. 공북문은 진주성의 정문으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을 했던 자리다.

공북문

길고 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병사들을 굶기지 않아야 한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는 어떤 전술과 전략도 소용이 없다. 그 막대한 군량은 모두 본국으로부터 가지고 올 수 없다. 반드시 현지에서 조달되어야 한다. 결국 왜군은 호남으로 진격하여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러나 바다에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가로막혀 갈 수가 없었다.


진주는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큰 고을로 일본군이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가려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진주목사 김시민의 동상

1592년 10월 5일 왜군은 진주성 외곽에 도착했다. 당시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김시민이 지휘하는 3,800명의 조선군과 2만 명의 양민이 있었다. 남강과 주변의 지형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천혜의 요새 진주성에서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왜병들과 함부로 대항하지 않고 적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방어 전술을 펼쳤다.

왜군 약 2만 명은 수 천 개의 대나무 사다리로 진주성을 공격했다. 김시민은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을 쏘게 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의 대나무 사다리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왜군을 물리쳤다.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그러나 김시민 목사는 성을 방어하던 중에 이마에 적탄을 맞았다. 이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상에서 39세의 일기로 순절하였다.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 단
서장대
북장대

2차전투는 1593년 6월 21일에 있었다. 왜군은 1차 진주성 전투의 참패를 만회하고자 10만의 대군과 강력한 화력을 앞세워 공격하였다. 당시 조선군은 4~5천 명에 지나지 않았고 명군과 의병 등의 지원도 받지 못했다. 진주성을 지휘하던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은 죽음으로써 진주성을 지킬 것을 결의하였지만 진주성은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촉석루

진주성 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변영로 시인의 논개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의 영정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는 진주 관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학설에 의하면 논개는 최경회의 첩이다.


학설에 의하면 논개는 원래 전라도 장수의 양반가의 딸이었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죽자 삼촌 주달무의 집에서 생계를 이어갔다. 주달무는 도박에 빠져 도박 빛으로 논개를 마을부자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팔아먹고 달아나자 논개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도망을 갔다.


이에 격분한 김풍헌은 논개 모녀를 관아에 고발하였고 당시 현감 최경회가 그 재판을 맡았다. 최경회는 논개 모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 무죄방면했으며 모녀가 살 길이 막연하자 관아에서 잔심부름하며 살게 하였다.


장성한 논개는 최경회의 첩으로 들어갔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이 된 최경회를 뒷바라지하였다. 그리고 1차 진주대첩에서 공을 쌓아 경상도우병사가 된 최경회를 따라 진주로 가게 되었다.

 

남강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는 김천일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그리고 왜장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남강 변 촉석루에서 술판을 벌였다.


이때 논개는 관기들 틈에 끼어들었다. 논개는 술에 취한 왜장 중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꾀어내어 남강의 바위 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를 안고 그대로 강물에 투신하였다.

논개가 왜장을 안고 뚜신한 의암
의기사

의기사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논개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나라의 원한을 갚기 위해 남편을 따라 왜장을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유인한 후 남강에 몸을 던졌다. 의기사는 그 의로운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16년에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창건한 이래 두 차례에 걸쳐 중건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열회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중건한 것이다

오희문의 세미록(원본)

진주성싸움은 마치 우리가 현장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알려져 있다. 우리가 이렇게 전쟁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생사의 촌각을 다투는 전쟁 중에도 불구하고 선조들이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류성룡의 징비록, 오희문의 쇄미록, 노인의 금계일기 등은 모두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기록들이다.


특히 이곳 진주성에는 오희문이 1591년 11월 27일부터 1601년 2월 27일까지 만 9년 3개월 동안 쓴 일기가 진본으로 전시되어 있다. 개인의 일기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보고 들은 의병장 들의 활약상, 왜군의 잔인함, 피난민들의 삶, 군대 징발과 군량 조달, 양반의 특권과 노비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 임진왜란의 또 다른 면들을 풍부하게 해준다.

오늘도 진주성에서 또 하나의 역사를 공부했다. 김시민 목사, 논개, 최경회, 그리고 오희문의 쇄미록까지 몰랐던 우리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의 바위나 건물을 보면 그것은 하나의 돌덩이와 나무조각에 불과하지만 그것에 역사를 알고 나면 그것은 커다란 의미가 되고 감동이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걷는다. 걷고, 보고, 느끼고, 배운다. 그리고 그곳에서 삶의 소중한 의미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