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는 줄어들고 아파트 공급률은 이미 포화상태인데도 집이 부족하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빈집은 많은데 집이 없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환경주의자들은 아파트 건설을 중단하고 주택 가격을 낮춰 다주택자들이 가진 빈집을 집 없는 자가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 주택 가격이 하락하면 부동산 대출로 집을 산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경제 성장률도 낮아져 경제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반대 의견이 강하다. 이러한 모순은 우리 사회에 깊숙히 박혀 있는 성장중독증 때문에 발생한다.
삼남길 구간은 여러 번 갔었지만 매번 건설 현장 때문에 길이 바뀌어 헷갈린다.
백운호수에서 출발하여 모락산 고개를 넘어간다. 9월 말이 되어도 햇빛은 여름과 다름없이 뜨겁다.
백운호수를 지나 모락산 고개를 넘는다.
모락산은 삼국시대에는 취기산, 고려시대에는 갈산이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조선 세종의 둘째 아들 세조가 왕위를 차지하자, 넷째 아들 임영대군은 위험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쳐 토굴에서 살았다. 임영대군은 산 정상에서 대궐을 바라보며 망배례를 드리고 국가의 평안을 기원했다. 그래서 이 산은 사모할 모(慕)자와 낙(洛)자를 합쳐서 모락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모락산 정상에 서면 안양과 서울, 그리고 북한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모락산 기슭에는 임영대군의 묘역과 묘역에서 20미터 떨어진 곳에 임영대군 사당이 있다. 원래 이 사당은 마을에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모락산 기슭으로 옮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시골 가옥이 즐비했던 자리에 수많은 빌라들이 늘어서 있다.
이곳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오매기 마을이다. 오매기는 조선시대부터 원래 문화 유씨를 중심으로 문씨, 진씨, 노씨, 미씨 등이 각각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섯 집 마을을 뜻하는 오막동이라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오전리 교회가 있던 이 마을은 백운산과 모락산에서 흘러내려 마을 앞을 지나는 오전천의 물길이 모락산 줄기 골자락 바위를 만나 휘돌아 흐르는 곳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곳 마을을 가리켜 마치 용의 머리와 같은 곳에 있다 하여 용머리라고 무른다.
마을로 가는 길에 하트 모양의 나무가 있어서 이곳을 지나는 연인들이 이곳에서 추억의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는 화산 현륭원의 사도세자 묘인 융륭을 참배할 때마다 사근행궁터에서 쉬었다가 행차하였다, 이곳 지명인 왕곡동의 왕림은 바로 왕이 행차한 곳이란 뜻으로 왕림(王臨)이러고 해야하나 王이란 한자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어서 旺(왕)으로 고쳐서 왕림(旺臨)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이곳 사근행궁터는 또한 3.1운동 때 800여명이 경찰 주재소를 둘러싸고 만세를 부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근행궁터가 있는 이곳도 재건축으로 인하여 마을 전체가 을씨년스럽다.
고천동 주민센터의 사근행궁터를 지나쳐 경수대로를 건너 의왕시청을 가는 길에도 온통 아파트 개발이 한창이다. 이제 우리나라 전체가 사각의 아파트공화국으로 전락될 듯싶다.
경수산업도로는 서울과 수원간 산업물동량을 원활하게 수송하는 구실을 하는 길인 데서 이름 붙여졌다. 경수산업도로는 금천구 시흥동 시계에서 경기도 안양시와 의왕시를 거쳐 수원시 시계에 이르는 폭 35~ 50m, 길이 27㎞의 왕복 6~8차선 도로로 1976년에 개통되었다.
골사그네에서 골목길을 따라 산길로 들어가면 박정희 대통령의 식목일 기념 조림지가 보인다. 식목일은 1946년에 해방 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법정기념일이다. 하지만 연탄이 보급되기 전까지는 땔감 부족으로 산을 망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산은 벌거벗은 붉은 산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 운동을 통해 주택의 난방 시스템을 개선하고 산에 들어가거나 나무를 베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곳은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과 다른 주요 인사들이 식목행사를 자주 했던 곳으로, 우리나라의 산림녹화운동의 역사적인 장소이다.
광교산은 수원시를 품에 안듯 감싸고 있는 높이 582미터의 산이다, 서기 928년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았고, 이때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광교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오늘의 마지막 종착점인 지지대비에 도착한다. 지지대비는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1807년에 세워졌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릉원의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만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무덤을 볼 수 없게 되어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게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하다 하여 한자의 느릴 지(遲)를 두 개 붙여 지지대 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지지대는 삼남길의 마지막 종착지이지만 버스정류장이 없어서 버스를 타려면 1킬로미터 정도 되돌아 가야 한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종착지를 골사그네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한 걷는 도중에 아파트 건설 현장의 가림 막이 때문에 경치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것도 아쉽다. 아파트 건설은 이제 그만하고 도시의 경관을 더 아름답고 쾌적하게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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