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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길

경기삼남길 제6길 화성효행길 - 정조의 효심이 깃든 길

조선시대 21대 왕인 영조의 아들이자 22대 왕인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는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2살 때 이미 한자 60자를 쓸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생후 100일 만에 어머니와 떨어져 궁녀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이후 병정놀이, 삼국지, 무술 관련 서적 등을 즐겨 읽으며 무예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를 마땅찮게 여긴 영조는 점차 세자를 엄격하게 대하게 된다. 특히 세자가 13살이 되면서부터는 더욱 더 혹독한 질책을 받게 되었고, 대리청정을 시작한 15살 이후로는 본격적인 학대가 시작된다.

영조는 자신의 의견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네가 왕이냐?"라고 꾸짖었으며, 궁금한 점을 물어봐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며 꾸중하였다. 또한 날씨가 흐릴 때에도 "세자가 덕이 없어 그렇다"며 비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장조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얻게 되어 내관이나 신하들을 죽이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게 된다. 결국 이로 인해 영조는 분노하여 장조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 이후 장조는 '사도'라는 시호를 받았다가 정조가 즉위한 후 '장헌세자'로 추존되었으며, 고종 황제 때 다시 '장조황제'로 높여졌다.


경기 삼남길 제6길 화성효행길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찾아가는 길로, 정조의 효심이 담긴 길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과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화성효행길의 시작점인 배양교부터 종착점인 세마교까지의 코스를 소개하고, 그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주요한 장소들을 간단히 설명하겠다.

배양교

화성효행길의 시작점은 배양교이다. 배양교는 교통이 다소 불편하기 때문에, 중복들길과 연이어서 가는 것이 편리하다. 배양교는 화성시의 행정구역이며, 화성시는 과거 수원 및 오산과 같은 행정구역이었다. 1949년에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하면서 수원군의 나머지 지역이 화성군이 되었고, 2001년에 화성군이 시로 승격하여 현재의 화성시가 되었다.


화성효행길은 백의종군길과 같은 경로를 따르며, 정조 대왕이 죽은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 수백 명의 관료들과 함께 이 길을 지났다. 반면 이순신 장군은 선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한 후에도 왜군의 침략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혼자서 이 길을 걸었다. 이 길을 걷는 동안에는 눈이 쌓인 넓은 들판에서 수많은 철새들이 먹이 활동을 하며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배양동


화성효행길을 따라가다 보면 배양동이라는 곳을 지나게 된다. 배양동은 토양이 좋은 배양토이기 때문에 “배양치” 또는 "뱅치"라고 불렸다. 또한 지형이 뱀처럼 생겨서 또는 뱀이 많아서 “배암”, “배암치”, "뱅치"로 불리다가 "배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배양동을 지나면 자연마을 중 제청말이라는 곳이 나온다. 제청말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옮길 때 마을에 제청을 차린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제청은 조선시대에 임금이나 왕비가 묘를 찾아가거나 묘를 옮길 때 마련하는 임시의 장소이다.

 

백천장의 묘


제청말을 지나면 고려의 문신 백천장의 묘가 있는 곳이다. 백천장은 중국 원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문신이다. 그는 중국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조선으로 가져와 문화와 정치 발전에 기여하였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인 현릉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인근 10리 이내의 백성의 묘지는 모두 이장하도록 하였으나, 백천장의 묘는 예외로 인정하여 현재 위치에 남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백천장의 묘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 중 하나다.

 

백천장의 묘를 지나면 길 옆에 화성시 정조 효 노인복지관이 보인다. 이 복지관은 정조의 효심을 기리고 노인들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정조의 효심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곳곳마다 정조의 효심을 강조하지 않은 곳이 없다.

 

화성효행길을 따라 조금 더 가면 용주사라는 절이 나온다.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때 염거화상에 의해 창건된 고찰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새로 만들면서 이곳을 원찰로 삼아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담아 다시 크게 지었다. 용주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이 있는 이유는 정조가 용주사를 지을 때 호성전을 건립하여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용주사를 나와 다시 길을 걷는다. 예전에도 이 길을 한 번 걸었는데 그 때는 작은 집 몇 채뿐이었는데 몇 년 만에 천지가 개벽을 하였다. 여기저기 아파트 들이 즐비하게 들어섰고 작은 길은 커다란 대로로 변모해 있다.

 

도심을 빠져나와 다시 들길로 들어선다. 차 한대 겨우 지나갈 작은 농로 옆에 차를 피해 대기하는 공간에 초등학생들의 작품이 걸려 있다. 그 그림들을 보고 있으니 마음은 어느새 어린 시절 동심으로 돌아간다.

 

 

길가에 폐타이어로 만든 장군 동상이 보인다. 누가 만들었는지 멀리서 보면 전혀 타이어로 만든 것 같지 않고 실물의 장군 같다.

 


길을 계속 걸어 황구지천에 들어선다. 저녁 노을이 깃든 황구지천에는 철새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드디어 종착점인 세마교에 도착한다. 세마교는 화성효행길의 끝점이자, 사도세자의 묘인 현릉원의 입구이다. 세마교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찾아가는 길에 세운 다리로, 세마는 "말을 씻다"라는 의미로 권율이 독산성 전투에서 말을 씻는 광경을 연출해 왜군을 물리친 일화에서 유래한다. 

화성효행길은 정조의 효심이 담긴 길로,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과 유적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길이다. 코스는 대체로 평평하고 걷기에 편하며,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다양한 경험과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화성효행길을 걷는 것은 정조의 효심을 배우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가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