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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길

경기삼남길 제7길 독산성길 - 독산성에 올라 주변 풍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길

임진왜란 당시 권율은 광주 목사에 임명되어 전라도를 방어했다. 이후 수도 회복을 위해 2만 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수원 독성 산성에 진입해 진영을 구축했다.

왜군의 총사령관인 가토는 물 한 방울도 없는 독산성의 대규모 군대를 고립시키기 위해 성 주변을 둘러쌌다. 이때 가토는 실제로 물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권율 장군이 주둔하고 있던 곳으로 물지게를 보냈다. 이에 대해 권율은 물이 충분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백마를 산 위로 끌고 올라와 흰쌀로 말을 닦는 척 했다. 이를 본 왜군은 산 꼭대기에서 물로 말을 닦을 만큼 물이 많다고 착각하고 철수했다.

이후 선조는 권율에게 독산성을 떠나 서울 근처로 이동하여 명나라의 남쪽 진출을 돕도록 명령했다. 권율은 대규모 부대의 이동을 은폐하기 위해 독성산성에 일부 병력만 남겨둔 채 대부분의 병사들을 비밀리에 행주산성으로 이동시킨 후 전투를 벌였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은 권율장군의 세마(洗馬)의 전설이 있는 경기도 삼남길 7코스 독산성길을 간다.

세마교
황구지천


경기도 삼남길 7코스인 독산성길은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적인 유적을 따라가는 산책로로 알려져 있다. 이 길은 세마교에서 시작하여 독산성, 여계산, 고인돌공원, 그리고 은빛개울공원까지 이어지며 총 길이는 8.2km다.



독산성은 백제 시대에 닦아진 매우 오래된 성으로, 신라와 고려도 이곳을 사용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왜군을 물리치고 이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독산성 주변에는 백제고찰인 보적사가 있다. 보적사는 백제 아신왕 때인 401년에 전승을 기원하고자 창건되었다. 독산성과 세마대지와 관련된 시설이 성 내부 전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성곽과 세마대지의 최소 면적만이 문화재구역으로 지정되어 보존 및 관리되고 있다.

보적사 창건에는 전설이 전해진다. 가난한 노부부가 쌀이 조금 남았을 때, 부처님께 공양 드리기로 마음먹고 공양을 했다. 그 후 집에 돌아오니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어 보배로울 보(寶) 쌓을 적(積)자를 써서 보적사라 불렸다.

독산성 정상에는 권율장군이 왜군을 속이기 위해 쌀을 씻었다는 세마대가 있다.

 


 독산성은 오산시에 있는 삼국시대 성곽으로, 1592년 임진왜란 중에 권율 장군이 전라도로부터 병사 2만여 명을 이끌고 주둔하여 왜병 수만 명을 무찌르고 성을 지키며 적의 진로를 차단한 곳이다. 독산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원래 백제가 쌓은 성일 것으로 추측되며,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독산성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도 어려 있다.

어느 날 사도세자는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비를 맞아 환궁하게 되었다.  그때 독산성에서 하루를 묶게 되었고 이곳 백성들과 소통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30년 후 사도세자와 얽힌 독산성을 없애야 한다는 풍수지리적 논란이 있었는데 정조는 아버지는 사도세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오히려 독산성을 고쳐 쌓도록 지시했다.


독산성은 오늘날 주변 경치를 한눈에 즐길 수 있으며, 백제고찰인 보적사와 삼림욕장도 둘러볼 가치가 있다.


동탄 어린이천문대를 지나 여계산에 오른다. 

애기바위

여계산 기슭에는 자식을 살리려는 어머니의 마음을 지키지 못한 애기바위에 얽힌 슬픈 전설이 내려온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오산 금양동 마을을 공격했을 때 일이다. 왜군은 이 마을의 지형이 중요한 인물이 태어날 곳임을 알고 아기와 임산부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한 여인이 왜군을 피해 자신의 아이를 바위 밑으로 감추려 했지만 아기가 울어 왜군에게 발각되었다. 이에 왜군은 냉혹하게 바위를 톱으로 자르며 아이를 살해했다."

당집터

또 여계산 자락에는 산신제를 지내던 당집터가 보인다. 이곳은 오산시 금양동 마을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겨 제를 올리던 당집이 있던 자리다.  그러나 2003년 이후 세교지구 개발로 당집이 헐리게 되고 지금은 그 자리에 정자만 남아 있다.

고인돌정원

마지막 종착지로 가는 길에 고인돌 정원이 있다.

이곳 '금암리 지석묘군'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로 1988년 12월 화성문화원과 한양대학교 연구팀이 처음 발견한 지석묘군으로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덮개 돌의 밑부분이 흙 속에 묻혀 자세한 구조는 파악하기 힘드나 대략 드러난 형식으로 보아 바둑판 식으로 추정된다. 덮개 돌의 가장 큰 것은 6m나 된다. 각 덮개 돌은 둘레의 돌을 다듬은 흔적이 있다. 덮개 돌의 윗면에 수직으로 패인 알 구멍이 있는 지석묘는 구멍의 파임 새로 보아 쇠붙이를 이용하여 만든 듯하다.(출처: 네이버 백과)


마지막 종착지인 은빛개울공원에 도착했다. 체감온도 영하 12도의 3월 중 가장 추운 날에 걸었지만 독산성과 세마대지는 역사와 자연을 만끽하며 걷는 경험을 통해 특별한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