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주길

경기삼남길 제9길 진위고을길 - 평택의 옛 중심지였던 진위고을을 지나는 길

임진왜란 중 조선군의 첫 승리는 옥포해전이었다. 이 전투는 1592년 5월,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 앞바다에서 벌어졌다. 이순신과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일본 함대를 크게 무찌르며 승리를 거뒀다. 이 승리는 조선 수군이 남해안 제해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원균과 함께 싸운 전투에서도 승전보를 단독으로 조정에 제출했다. 이순신이 계속해서 임금에게 단독으로 승전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원균의 공적에 대해 언급하지 않자, 원균은 이순신에게 불만을 품었다. 때로는 술에 취해 나이 어린 상관인 이순신을 찾아가 행패를 부렸다.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원균은 이순신이 전쟁을 지속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졌다. 이순신은 이길 수 있는 전투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지만, 원균은 이순신의 전략적 판단을 인정하지 않았고 함께 출전하자고 때로는 설득을 하고 때로는 행패를 부렸다. 이순신은 지형, 조류, 날씨 등을 전술과 전략에 활용하여 열세한 전력으로도 승리를 거두는 반면, 원균은 무모하게 싸워 우세한 전력임에도 여러 차례 패배를 맛봤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원균은 이순신이 싸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싸우지 않는다고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왕이 이순신에게 전투 참여를 명령하자 이순신은 이에 따르지 않았고, 결국 이순신은 한양으로 소환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왕이 국가를 대표하며, 왕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충성의 표현이었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에게 왕은 즉시 출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원균은 도원수 권율에게 수륙병진책을 건의하였으나 이는 무산되었다. 원균이 출전을 주저하자 권율은 원균에게 곤장을 치며 단독 출전을 강요하였다. 결국 원균은 패배가 예상되는 전투에도 불구하고 왕명을 따르기 위해 출전하여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였다.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한 이후 함선을 이끌고 고성 추원포로 후퇴했다가 이곳에서 배를 버리고 상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원균은 부하들은 먼저 도망치게 하고 스스로 왜군을 유인하여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균의 생애는 많은 역경과 도전을 겪었다. 그는 여러 차례 무과에 응시하였고, 선전관을 거쳐 변방에 파견되었다. 그는 경상우수사, 삼도수군통제사, 전라좌병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의 생애와 그가 겪은 여러 전투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원균의 생애와 업적은 그의 충성심과 능력, 그리고 그가 겪은 여러 전투와 그의 죽음을 통해 볼 수 있다. 그의 업적은 그의 시대와 그가 겪은 여러 사건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오늘은 평택의 옛 중심이자 원균장군의 묘가 있는 경기삼남길 제 9길 진위고을길을 간다. 진위고을길는 오산의 맑음터 공원에서 시작하여 원균장군 묘까지 이어지는 약 17.9 km의 코스다. 


불과 한 달 전에 경기삼남길 8길을 걸을 때는 강한 추위에 옷깃을 여며 걸었다, 하지만 오늘은 온 세상은 울긋불긋 꽃 단장을 하고, 4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햇볕은 한여름처럼 뜨겁게 내리쬐고 있다.

LG로

십여 년 전만해도 시골길이었던 이 길은 ‘LG로’라는 이름 하에 서브원, 엘지이노텍 같은 LG그룹사가 모여 있다.  또한 평택시에는 사업체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경기도 전체 사업체의 약 4%를 차지한다고 한다.


길을 걷는 중에 보이는 곳이 온통 배 밭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를 찾아보니 평택은 경기도 과수면적의 21%인 933ha에서 19,000톤의 배를 생산하는 배 주산단지라고 한다. 기후가 온화하고 비옥한 점질 토양에서 자란 평택 배는 나트륨, 칼슘, 마그네슘, 인, 유산 등의 함량이 높아 체내 혈액을 중성으로 유지하는데 큰 효과가 있고, 높은 당도와 아름다운 모양 그리고 투명하고 고운 빛깔을 자랑하며 저장능력도 전국에서 가장 뛰어나 소비자들에게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봄날이다. 하늘은 맑고 푸르게 빛나고 있고, 뜨거운 햇살이 얼굴을 쓸고 지나간다. 친구들과 함께 걷는 길은 복숭아 꽃과 배꽃이 만발한 풍경이다.

복숭아 꽃은 그 분홍색 꽃잎이 마치 봄의 시작을 알리는 듯 하다. 배꽃은 그 흰 꽃잎이 마치 봄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 꽃들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며, 마치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진위 초등학교가 보인다.  1899년 4월 7일에 개교한 진위 초등학교는 지역 유지들이 신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공립 진위소학교로 설립하였다. 수업연한 4년에 수신,국어,산술,역사 등을 주로 가르쳤으며, 1923년 4월 수업연한을 6년으로 연장하였으며, 진위공립심상소학교를 거쳐, 1946년 9월진위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진위면사무소

진위면사무소는 3.1운동 만세 시위지로 주민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3월 11일에 봉남리에서 처음으로 천도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시위하였고, 3월 21일에는 봉남리와 야막리 주민 500여명이 면사무소를 습격하였으며, 3월 21일에는 주민 400여명이 이 면사무소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진위향교

면사무소 앞에는 진위향교가 자리잡고 있는데,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 교육기관으로서 유생들의 학문과 예절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1398년에 창건한 진위향교는 명당 중에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 향교는 병자호란의 불길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지만 1644년에 당시 현령이 대성전을 중수 함으로서 그 위용을 되찾았다.

진위향교 선정비군

진위향교 옆에는 진위향교 선정비군이 있다. 선정비군에는 경기도관찰사 선정비 3기, 진위현령 선정비 15기, 광주부윤 선정비 1기, 능성구씨 송덕비 1기가 있다. 이 비석들은 대부분 견산리와 봉남리 삼남대로 길목에 있었는데 1985년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다. 이 중에서 주목되는 인물로는 정도전의 손자인 정속,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의 외조부인 이세필, 박문수의 현손 경기도 관찰사 박영보가 있다. 


진위천변을 따라 이어지는 진위고을길에는 달맞이 꽃, 애기똥풀 꽃 등이 피어 있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함께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이곳 진위면 은산리 산대마을은 개국공신이자 조선의 설계자인 삼봉 정도전의 후손들이 사는 봉화정씨 씨족 마을이다.  정도전은 재상들을 중심으로 한 이상국가를 꿈꿨지만 왕권을 강화하려는 이방원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그 꿈은 좌절되었고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 2년 정도전은 복권되어 그의 위패와 영정은 현재 이 마을 사당에 모셔지고 있다.


조선시대 삼남대로 평택구간의 가장 큰 험로는 대백치와 소백치였다. 여행자들은 수원에서 진위면 봉남리 진위주막과 마산리 샛뚝거리 주막을 거치면서 이 소백치를 넘어 백현원에 다다랐다. 충청도 내포 사람들도 이 길을 따라 한양을 오갔다. 조선시대 맹사성도 고향 부모를 뵈러 이 길을 다녔다. 맹사성은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해 백현원 주막으로 들어갔다. 녹사 벼슬을 얻으러 가는 젊은 선비가 남루한 행색의 맹사성을 보고 공문공답으로 무례하게 굴었다, 공문공답을 하고 헤어졌던 젊은이는 나중에 벼슬을 얻어 재상들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맹사성을 만나 죽었구나 했지만 맹사성은 너그러이 그들을 용서했다고 한다.

 

원균장군묘


원균장군 묘에 도착했다. 원균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장수 중의 한 사람이다. 과거 급제 후 자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남해안의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1597년 8월 27일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하고 거제도로 퇴각했다가 왜적에게 사살되었다. 임진왜란 발발부터 칠천량해전까지 참전해 사후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고 선조에 의해 선무공신에 녹훈되었다.

 

원균묘

현재 원균의 묘는 원균 시신의 행방을 확인할 수 없어 유품을 묻어 조성한 묘이다, 원군 장군 묘 아래에는 작은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원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천리를 달려와 원균의 생가에 신발과 담뱃대를 놓고 죽은 말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경기 삼남길 9길인 진위고을길은 원균 장군 묘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이번 길은 총 17km 이상의 긴 여정이었다. 역사와 문화, 자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을 친구들과 함께 걸으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마지막 구간에서는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이런 멋진 풍경과 좋은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