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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길

경기삼남길 제10길 소사원길 - 바른 정치의 이상이 담긴 대동법의 길!

임진왜란으로 인해 대부분의 경작지가 파괴되어 농사지을 땅이 부족했고, 그나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대부분 부자 양반들의 소유였다. 일반 농민들은 양반들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수확된 농산물의 절반을 지주에게 지대료로 지불해야 했다. 또한, 남은 절반은 지방의 특산물로 바꾸어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농민들은 거의 이익을 얻을 수 없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 대신 민심을 수습하고 왜란에 대처하면서 백성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고 대동법을 실시하였으며, 중립 외교를 수행하는 등 조선 땅에 전쟁이 없는 세상을 꿈꿨다.

대동법은 조선 후기의 조세 제도로, 각 지역의 특산물을 공물로 제출하는 대신 미곡, 삼베, 무명 등의 작물 또는 돈으로 세금을 내는 정책이었다. 이는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국가의 수입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대동법은 토지의 면적에 따라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토지를 많이 보유한 양반 지주들은 세금 부담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기존 권력층인 양반과 지주들은 이 정책에 강하게 반발했다.

광해군은 대동법을 통해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백성을 위한 정책을 추구하고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애민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다른 역사관에서는 광해군을 애민 정신이 뛰어난 왕, 정치적으로 희생 당한 왕과는 달리 임진왜란 때 도움을 받은 명나라를 배신하고 가족에게는 불효하는 조선의 유교 사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폭군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따라서, 광해군의 업적과 평가는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될 수 있으며 역사적 사실과 개인적인 견해를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침부터 맑은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지난 며칠간 계속되던 비와는 대조적으로 상쾌한 하루였다. 오늘은 경기도의 마지막 삼남길인 제10길 소사원길을 걷는 날이다.

삼남길은 조선시대 삼남지방(충청, 경상, 전라)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을 향해 걸었던 옛 길이다. 이번 코스는 원균 장군 묘역에서 시작하여 안성천교까지 약 15.6km 구간이다.

 

원균장군묘


원균 장군 묘역에서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공사 현장이 나타났다. 삼남길 표시판을 따라 가려 했지만 굴착기와 파헤친 흙더미만 보일 뿐 제대로 된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침반만을 믿고 남쪽 방향으로 내려갔다. 

 

팔용당저수지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1945년에 완공된 팔용당 저수지였다. 저수지 한쪽에 묶여있는 소나무에는 삼남길 리본이 걸려있었다.

 

모퉁이 길마다 서 있는 삼남길 안내를 따라 첫 번째 목적지인 '옥관자정'에 도착했다. 이 곳은 조선시대 16대 임금인 인조가 우물 맛을 보고 감탄해 옥관자를 내렸다고 하여 '옥관자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옥관자정 옆에는 스탬프 찍는 곳이 있어, 여행의 첫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

인조는 조선에 도움을 준 명나라를 숭배하지 않고 떠오르는 오랭캐 나라인 청나라와 가까이했다는 명분 하에 광해군을 내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왕은 청나라 누루하치 앞에서 이마를 땅에 찍어가며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고, 조선의 수많은 부녀자들은 청나라에 끌려가 능욕을 당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만신창이로 고향에 돌아온 부녀자들은 환향녀라는 이름 하에 또 한 번 설움을 삼켜야 했다.

인조는 이후 소현세자가 청나라를 통해 서양 문물을 들여오자 오랑캐의 것이라 하며 소현세자에게 벼루를 던진 왕으로도 유명하다. 만약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또는 인조가 뒤늦게라도 소현세자가 가져온 신문물을 받아들였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옥관자정에서 삼남길 스탬프를 찍은 후 다음 목적지로 출발했다.

 


평택의 '소사원'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삼남대로가 지나가는 소사1동 일대에 있던 주막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소사원'의 본래 이름은 '소초원(所草院)'으로, 조선 전기에는 그 일대의 소사벌에 갈대가 무성했기 때문에 '초(草)'자를 넣어 불렀다.  '소사(素沙)'라는 지명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생겨난 것으로, 소사벌의 모래밭을 뜻하는 '소사(素沙)'에서 비롯되었다.  '소사원'이라는 지명은 과거 그 일대에 있던 주막의 이름인 '소초원'에서 유래했으며, 주변 지형인 갈대밭과 모래밭 등의 지리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인덕원, 갈원 등 보통 지명에 원(院)이라 붙은 곳은 여행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숙식을 하던 여관이 있던 곳을 말한다. 당시 소사원길은 삼남대로의 중요한 교통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통해 이동하였다.

 


 '통복천’을 지나간다. 통복천은 경기도 안성의 칠곡저수지와 평택의 배다리 저수지로부터 시작되어 내려오는 하천이다. 특히 삼성전자 DS부문 평택캠퍼스에서 이곳에 바람숲길 정원을 조성하여 자전거 타기도 좋고, 공기 좋은 날에는 산책하기도 좋은 곳이다.

 

동부공원


동부공원을 지난다. 자작나무와 푸른 소나무로 조성된 이 공원은 여행객의 피로감을 한 번에 씻어준다.

 


배다리생태공원은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 일대의 소사벌 택지지구 개발 과정에서 만들어진 공원이다. 이 개발 사업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시행하였으며, 초기 계획에서는 생태 이동 통로와 습지 등 자연 환경을 보존하는 방안이 빠져 있었으나, 시민 사회와 평택시 의회에서의 요구로 인해 계획이 수정되었다. 배다리생태공원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소사벌 택지지구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조성되었으며, 자연 환경을 보호하고 주민들의 휴식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대동법시행비

다음 목적지는 '대동법시행기념비’다. 대동법은 조선시대에 현물세였던 공납을 쌀로 납부하게 하여 임진왜란 이후의 궁핍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탐관오리의 착취를 없애기 위해 만든 법이다. 이 기념비는 평택 소사동에 위치하며, 조선시대의 실학자 김육이 대동법 시행을 주장하다 실패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의 정식 명칭은 '조선국영의정김육공대동균역만세불망비’다.

 


김육은 당시 불평등한 세금제도를 개혁하고자 대동법을 주창했지만,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유배를 당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524년(중종 19년)에 평택 소사동에 이 비석이 세워졌다. 비석에는 대동법 시행 과정과 김육의 공로, 그의 유배 사실 등이 새겨져 있다. 대동법은 그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광해군 때에 일부 시행되었다. 이는 조선 전기의 실학사상과 평등 사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여겨진다.

이곳에서도 삼남길 스탬프를 찍고 간다.

 

소사벌 전투현장


이곳은 임진왜란과 청일전쟁 두 번이나 왜군과 중국군이 싸운 '소사벌싸움'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 군대와 일본군대 간의 휴전 논의가 무산되자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공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은 진주와 남원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해상에서도 조선군을 궤멸시키며 북상해갔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은 이에 맞서 소사벌에서 격렬히 저항하였고, 결국 일본군의 북상은 저지되었다.

 



그로부터 400년 후인 1894년에는 일본군과 청나라군이 다시 한번 소사벌에서 충돌했다. 이번엔 청나라군이 안성천 남쪽에 진영을 구축하고 일본군은 소사벌 북쪽에 진영을 갖추었다. 첫 번째 전투에서는 청나라군이 우세하였으나, 하루도 채 되지 않아 5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일본군에 크게 패배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조선에 대한 침략 의지를 더욱 노골화하게 되었다.

"소사벌"은 한반도 경기도 평택시 비전동·죽백동 일대의 옛 지명으로, 역사적으로는 임진왜란과 청일전쟁 때 각각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서의 전투 장소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임진왜란 때는 조선-중국 연합군이 일본군의 북상을 막기 위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며, 청일전쟁 때는 중국군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소사벌"은 한일 양국 및 중국에서도 잘 알려진 군사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다.

 

경기둘레길

삼남길의 마지막 종점인 안성천교에 도착했다. 삼남길 제10구간인 소사원길을 걸으며 평택의 역사와 문화를 만끽할 수 있었다. 소사원의 유래에서 비롯된 지명에는 이 고장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대동법시행기념비 앞에서는 조선시대 실학자 김육의 개혁정신과 기득권에 반발하는 지금의 시대상이 그대로 오버랩 되었다. 만개한 배꽃 들판을 지나며 평택의 아름다운 풍광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걸으며 경기도 남태령에서 남부 끝자락까지 이어진 삼남길의 매력에 푹 빠졌다. 마지막 안성천교에 도착해 경기삼남길 전 구간을 완주하니 큰 성취감과 뿌듯함이 밀려온다. 이 길을 걸으며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와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런 소중한 길을 더 많이 걸으며 우리 문화유산을 가까이에서 체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