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걷는다.
수원둘레길을 걷는다.
그 길의 마지막 길
공교호수공원의 신대호수에서 지지대비까지 걷는다.
시작은 항상 마지막과 출발의 경계 지점에 있다.
지난번의 끝점과 이번 길의 시작이 신대호수다.
신대호수는 자연과 교감하며 산책을 즐기는 힐링 공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성된 신대호수길을 따라 곳곳이 이름 붙여진 수변 테라스, 먼섬숲, 조용한 물숲, 향긋한 꽃섬, 재미난 밭을 따라 둘레를 돈다.
신대호수 북쪽에 버드나무가 늘어진 습지와 물억새와 무늬큰고랭이 등 습지식물이 무리를 이루는 수변을 따라 걸으면 몸과 마음은 어느새 자연과 하나가 된다.
10여미터 높이의 작은 동산을 넘으면 광교 중앙공원의 넓은 뜰이 펼쳐진다.
광교중앙공원의 그 빛은 참으로 신비롭기만 하다. 가을과 늦가을의 경계에 있는 그 곳은 아직 덜 익은 계절의 사과처럼 나뭇잎의 빛이 서서히 가을을 떠날 준비를 한다.
이 고개의 오른쪽 밑에 있는 마을의 이름은 길마재다. 안현(鞍峴)이란 길마재의 한자 이름이다. 이 마을은 줄다리기로 유명한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250년전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의 장진종이라는 사람의 꿈에 죽은 아버지가 신선이 되어 나타나 말했다.
"내 묘지 아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힘을 합하고 용기를 다하여 정월 대보름 다음날에 줄다리기를 하라. 그러면 신의 힘을 입어 온 동민이 무사하고 연중 풍작으로 만사 대통하리라"
이에 인근 마을 사람까지 총동원되어 줄다리기를 하니 과연 전염병은 사라지고 풍작으로 마을이 편안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매년 줄다리기를 하게 되었다.
이 행사는 이 마을의 이름을 따서 길마재 줄다리기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장대홍묘전 줄다리기', '장장묘 줄다리기", '장작묘 줄다리기' 등으로 불린다. 이는 이 행사가 묘소 앞 공터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여담은 여장(女墙)의 다른 말로 성벽 위에 설치하는 낮은 담장을 의미한다. 수원화성의 성벽은 여장의 곡선이 아름다운데 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여담을 따와 여담교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수원둘레길은 일반 둘레길이 아니다. 인생길이다. 몇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하는 그야말로 참고 견뎌야 하는 힘겨운 인생 등산 코스다. 지금부터 그 본격적인 광교산 등산이 시작된다.
광교산에는 유달리 소나무가 많다.
수없이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마시며 10여키로미터의 행군은 지속된다.
버들치 고개는 수원시와 용인시의 경계선이 된다.
옛날 이 고개 양쪽이 늪지대여서 버들이 무성하여 이곳에서 버들을 채취하여 키나 고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수원시 경계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른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던 전쟁이 일어났다. 형제와 부모자식간의 총부리를 겨누고 명분도 없는 전쟁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때 죽은 사람의 대다수가 좌가 무엇인지 우가 무엇인지 몰랐다. 이념이 무엇인지 몰랐다. 오직 권력의 우두머리들의 정권욕과 미소 양국의 제국주의 논리에 그들은 희생되었다.
여기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그 무심한 세월의 무덤이 있다. 잠시 그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산을 오르는 동안엔 오직 소나무와 잡풀뿐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사방이 막혀 볼 수 없다.
그러나 정상에 서면 모든 것이 보인다. 세계가 보이고 우주가 보인다. 모든 것이 내 세상이다.
그러나 다시 내려가야 하는 것을.
내려가는 것은 다시 오르기 위한 준비일까?
둘레길 70미터 좌측에 김준용 장군 승전비가 있다.
이 비는 병자호란 당시 광교산에서 청나라 태종 매부이자 후금 태조의 사위인 적장수 양고리와 군사를 물리쳤던 김준용 장군의 전승비다.
이렇게 죽고 죽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애초부터 싸움의 빌미를 만들지 않았으면 전쟁 자체가 없었고 그 후 수백 년의 고통의 시간도 없었을 것을.
다가오는 미래의 실리보다는 권력자의 명분을 위해 그들은 떠오르는 청을 배척하고 쓰러져 가는 명을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의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명분이 아니라 실리인 것을.
실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의 안위와 행복인 것을.
그 때의 지도자도 지금의 지도자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광교산은 왕건(王建)이 이 산의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들을 위로하고 있을 때 산 정상에서 광채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는 "부처가 가르침을 내리는 산"이라 하여 '광교(光敎)'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이 둘레길에서 조금 빗겨나 얼마를 가면 해발 567m의 백운산 정상이 나오는 데 그냥 지나쳐 간다.
백운산은 청계산, 바라산, 백운산, 광교산을 한나절 종주산행하는 등산객에게 인기가 좋은 산이다.
전망대에서 산하를 내려본다.
산이 지나면 또 다른 산이 보이는
첩첩산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드디어 평지다.
평지에 있으면 멀리 있는 산이 그리웠다.
그러나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산을 하루 종일 타고나니 평지가 절실히 그립다.
제2차세계대전의 종말은 일제의 무조건적인 항복선언에 대해 갑자기 찾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일제에서 자연히 해방되었으나 다시 우리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통치를 받으면 안되었다.
미소양국는 전리품으로 얻은 한반도에 38선을 그어놓고 각기 분할 통치를 하기 시작했다.
1948년 8월 우리는 남한만의 합법적인 정부수립을 표명했으나 전리품으로 얻은 미국은 이를 허락할 리 없었다.
당시 천주교 신부였던 장면장관은 바티칸 교황을 독대했고 바티칸 교황의 압력하에 할 수 없이 유엔은 남한을 국가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군사력이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나라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군대가 없으면 소련에 의해 지배 받는 북한 공산당이 당장 쳐들어 오는 것이 자명하다고 장면 장관은 미국에게 애걸했지만 미국은 막무가내로 철수를 단행하였다.
미군이 철수하자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 공산당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남한을 공격했다.
결국 한국전쟁은 미국이 소련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예정된 세계전쟁이었다.
그 결과 좌우이념에 관계없는 백만이 넘는 백성이 죽어 갔고 전세계 청년이 이념의 희생양이 되었다.
효행공원은 조선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하여 1993년 지지대 고개 주변에 조성한 것이다.
드디어 수원시의 외각을 연결하는 경계를 모두 걸었다.
그 길은 칠보산과 황구지천, 원천리천과 광교호수, 신대호수, 광교산을 연결하는 자그마치 60.6km의 장대한 길이다.
그 길은 한 번에 걸을 수 없어 세 번에 거쳐 걸었다.
또한 오늘은 수원팔색길을 모두 걸은 날이다.
수원팔색길을 걸으면서 수원의 과거를 알았고 현재를 알았다.
그리고 어렴풋이 인생의 의미도 알았다.
힘들고 먼 여정이었지만 참 뜻 깊은 둘레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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