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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누리길

종로구 명륜동 길 - 성균관과 장면가옥

서울 종로구 명륜동은 필자의 아버지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 이곳은 아버지께서 태어나시고 어린 시절을 보내신 곳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태어나신 지 한 해 만에 어머니를 여의셨고, 할아버지는 43세 때 화신 백화점에 근무하는 23세의 처녀와 재혼을 하셨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새어머니를 한 번도 어머니라고 부르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당시 경성에서 꽤 부유한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국민학교 4학년 때 가출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그 가출한 아들을 찾아 경성 시내를 미친 듯이 헤매셨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고 생각할 즈음 길거리에서 새어머니와 마주쳤다. 새어머니는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아버지를 외면했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아버지를 찾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아버지는 더욱 실망하여 그 길로 경성을 떠나 만주를 거쳐 중국 청도에 가셨다. 청도의 식당에서 그릇을 닦는 등 온갖 고생을 하신 후 해방과 함께 다시 고향에 돌아오셨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한 푼의 유산도 상속받지 못하고 다시 집을 떠나 방황을 하셨다. 그 아버지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 이 명륜동이다.

 

명륜 중앙교회
필자의 아버지가 어린시절 살던 집
혜화 초등학교

그 옛날 한옥이 즐비했던 명륜동은 이제는 모두 서양식 건물로 바뀌었지만 80여 년 전 아버지의 향취는 그대로 그곳에 남아있다. 아버지가 다니었던 혜화국민학교, 명륜동 교회, 아버지가 살았던 집, 주인도 바뀌고 형태도 변했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그대로 꿋꿋하게 서 있었다.

성균관 명륜당

그 명륜동에는 생원, 진사 이상의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시험을 보고 들어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이 있다. 그 교육 공간의 중심건물은 명륜당이다. 이 명륜당에서 유생들이 안간의 심성인 이(理)와 기(氣)에 대한 학문을 토론하고 배웠다.

 

성균관 대성전
성균관 외삼문

성균관은 단순히 교육만을 담당하는 기관은 아니었다. 유학의 역사에 공헌한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것도 교육 못지않게 중요한 기능이었다. 성균관 앞쪽에는 성리학에 업적을 남긴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이 그것이다. 그 대성전 앞에 있는 외삼문은 대성전의 정문으로 항상 굳게 닫혀 있으며 음력 2월 첫 번째 정(丁)일과 음력 8월 첫 번째 정(丁)일 석전대제 때 열린다.

 

성균관 유생들의 기숙사


명륜당 앞쪽에는 동서로 길게 마주보고 있는 정면 20칸 측면 2칸의 긴 맞배 지붕 건물이 성균관 유생들이 기숙사로 쓰던 동재와 서재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의 방 밖으로 보이는 뜨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또한 일반 가정 집에 비해서는 굵은 네모기둥에 칸칸이 설치되어 있는 아궁이를 보니 정이 서려있는 시골집 기숙사 같은 느낌이 든다. 

성균관 진사식당


진사식당은 성균관 유생들의 전용식당이다. 총 33칸 규모의 건물로서 칸을 막지 않고 동시에 식사를 하였다고 하며 매 식사 때마다 유생들의 출석을 점검했다.


명륜당 앞에는 천연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두 그루 있다.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인 대사성을 지낸 윤탁이 1519년 중종 14년에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마치 용문산 은행나무를 보듯 장엄하고 웅대하다.


일제시대 일본은 조선 정치이념의 산실인 이 성균관도 아이들의 놀이터로 만들어 놓았다. 여기 성균관 모든 곳이 아버지의 어릴 적에는 술래잡기를 하는 놀이터였고, 외삼문 앞 도로는 개울이었다. 아버지 나이 여섯 살 때 아버지는 이곳에서 함지박을 타고 물놀이를 하셨다. 그러던 중 함지박이 뒤집혀 물에 빠져 물이 귀에 들어가서 중이염을 앓으셨고 이 때문에 한쪽귀가 영원히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을 상상하며 그 때 보았던 모습이 그대로라고 감회가 새롭다고 하신다. 단지 예전과 다른 점은 시냇물이 흐르는 대신 자동차가 흘러 다닌다는 것뿐. 그 옛날 시냇물이 흐르는 광경을 상상해 본다. 

그러나 시내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그 위로 사람들이 바지도 걷지 않고 거닐고 있다.


성균관을 나와 혜화역 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일본식 주택이 눈에 보인다. 문패를 보니 장면이라고 쓰여져 있다. 이곳이 제2공화국 때 총리를 지냈던 장면 총리의 주택이다.

 


독실한 천주교도였던 장면은 1946년초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서울시 교육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모든 무질서와 혼란의 원인은 무식함, 무지함 때문이며 교육만이 무너진 한국 사회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바탕임을 역설하였다. 또한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을 제창하였을 때 모든 나라들이 이름도 없는 약소국인 한국을 외면하자 바티칸의 교황을 직접 만나 교황의 후원으로 유엔총회의 지지를 얻어내 대한민국 정부시립에 실질적인 주역이기도 했다. 또한 1950년 미국에 체류 중인 상태에서 새벽에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대한민국 정부의 긴급훈령을 받아 미국 국무성에 알려 사태의 절박성을 전하였고. 미국의 상•하원을 찾아 다니며 한국 파병을 역설하였고, UN과 국제사회에 북한군의 남침을 알리고 한국 전쟁에 참전해줄 것을 설득하여 미군과 UN군의 한국 파병을 이끌어냈다. 그런 업적으로 1960년 대한민국 제 7대 국무총리에 당선 되어 실질적으로 나라를 이끌었으나 취임한지 불과 9개월만에 5.16 군사 구테타에 의해 실각되었다.


그 장면 총리가 살았던 집도 현재 이 명륜동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유리 여닫이가 있는 일본식 전통 가옥의 다다미로 된 거실에는 아직도 총리가 앉았던 의자, 가족사진이 그대로 걸려있다.

세월은 흐르고 그때의 그 사건들은 모두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지만 그 흔적만큼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그날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