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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누리길

낙산 공원길 - 한성대에서 흥인지문까지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 4번출구에서 10여미터를 내려가면 작은 산이 있다. 아니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약간 높은 산책로로 부르면 적당할 것 같다. 그 산이 낙산이다. 낙산은 산의 모습이 낙타 등처럼 볼록하게 솟았다고 하여 낙타산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이 낙산은 남산,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한양의 내사산으로 부르며 한양 도성의 한 축을 담당한다. 낙산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알려져 조선시대 많은 문인들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살았다. 


이 낙산의 성벽을 끼고 조금 걷다 보면 장수마을이라는 표석이 나온다. 이곳에 60세 이상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장수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국전쟁 후에 형성된 판자촌에서 시작된 이 마을은 원래 뉴타운 예정지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요청으로 재개발이 중단되고 주민들이 직접 집을 단장하고 골목길을 정비하여 지금처럼 산뜻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변했다. 돈에 눈이 멀어 아름다운 서울을 사각형의 볼품없는 아파트 도시로 만들어 놓은 위정자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장수마을에서 암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낙산공원이 나타난다. 젊은 연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사랑을 약속하는 이곳에서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인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서울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낙산공원에서 성벽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사람들이 많이 몰려 다니는 산동네 골목이 나온다. 이화마을이다. 골목도 좁고 지은 지도 아주 오래된 주택이 많다. 2006년 정부는 노후 되어 방치된 이 지역의 생활을 개선을 위해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예술가들을 동원하여 건물 외벽에 그림을 그리게 하고 빈터에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마을의 이미지가 밝고 화사하게 바뀌었다. 낙후된 지역은 이화 벽화마을이라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각종 TV프로그램에 반영되고 수많은 연인들과 해외각지의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각 대학의 예술 분야 학생들이 몰려와 계단에 아름다운 물고기 그림과 꽃을 그리고 100개가 넘는 작업물을 가져와 60개 전시물을 벽화마을에 추가하였다. 이제는 해외의 여느 관광지에 겨루어도 손색이 없는 멋진 모습이 되었다. 각 나라 관광객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기 시작했고 중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검색한 장소 5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 즈음 돈에 눈이 먼 한 건설 회사는 정부와 손을 잡고 이런 관광명소를 모두 철거하고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시민단체에서 개발을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지자 이 계획은 철회된다. 재개발 계획이 철회되자 일부 이화마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일부 마을 주민들은 이화 벽화마을의 방문객들이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이화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꽃 계단과 물고기 계단은 회색 페인트로 덧칠하는 등 관광객의 방문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5년전 그때보다 관광객의 수는 줄고 아름다운 골목의 모습도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마을의 모습은 멋지고 많은 해외 관광객들이 꾸준히 이곳을 찾고 있다.

이화장

이화마을에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의 사저 이화장이 있다. 이화장이란 이름은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배나무가 많이 있어서 이곳 정자의 이름인 이화장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광복 직후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거처할 집이 없자 주변 사람들이 안평대군의 사저였던 장생전을 이승만에게 기증했다. 서울시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이곳은 역사 기념물이니 일반인에게 공개하면 좋으련만 이화장의 대문은 굳게 잠겨 있다. 

한국인들은 고대부터 산의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았다. 한양의 도성도 역시 남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의 능선을 따라 쌓았다. 이는 다른 나라와 달리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국만의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낙산의 능선을 따라 쌓아 올린 한양 도성의 낙산 말미에는 한양의 정동쪽 관문 동대문이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5년 후인 1396년에 세운 동대문의 원래의 이름은 흥인지문이다. 지금의 문은 1869년 고종 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당시 서울 성곽에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세웠다. 동서남북의 사대문에는 각각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그 중 동쪽의 대문을 흥인문이라 하였다. 현판에 특별히 지(之)자를 놓은 것은 동대문 앞에 평평한 땅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한 의미라고 한다. 흥인지문은 서울의 숭례문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성문이다. 성문과 이어진 축대에 아치형의 통로를 내고 그 위로 문루를 세워 성문을 만들었다, 서울의 성문 가운데 문루를 2층으로 만든 것은 숭례문과 흥인지문 밖에 없다. 문루는 문을 지키는 장수가 머무는 곳으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문루 바깥에는 벽돌로 된 담장과 나무 판으로 괸 창문을 설치해서 적을 막는데 유리하게 했다. 흥인지문의 문루는 구조의 맞춤은 간단하고 장식이 많은 19세기의 건축물 특징을 잘 반영한다. 또 흥인지문의 앞에 적을 막기 위한 반달 모양의 옹성을 들렀는데 이는 서울 성문 가운데 유일하다.

한성대부터 낙산을 따라 걷는 이 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특히 11월에 단풍과 갈대가 우거진 낙산의 모습은 서울의 여느 길보다 멋지고 아름다웠다. 그 길의 아름다움을 마음 속에 고이 담아 놓고 오늘의 길 이야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