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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북한산둘레길 제2구간 - 순례길을 걷다가

순례길의 '순례'는 종교의 발생지 또는 성인의 무덤이나 거주지와 같이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 다니며 방문하여 참배하는 행위를 말한다. 순례길의 대표적인 곳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의 열두 제자였던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약 800km에 이르는 길이다. (네이버백과) 북한산둘레길에도 순례길이 있다. 이곳의 순례길은 독립유공자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 구간이다. 헤이그밀사인 이준열사와 초대부통령인 이시영선생의 묘, 국가를 찾기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친 공복군의 합동묘소가 있다. 동양의 평화와 국민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희생하신 분들은 종교의 성인보다 더 받들어야 할 성인이다.

순례길을 가려면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성신여대입구 역에서 새로 생긴 우이신설선으로 갈아타고 솔밭공원역에 내리면 된다. 솔발근린공원에서 향긋한 솔내음과 피톤치드를 마시며 북한산의 영험한 모습을 감상하며 길을 걷다 보면 북한산둘레길 제2구간 순례길 구간 입구에 마주서게 된다.

 

순례길 입구에 접어들면 가파른 계단과 마주한다. 그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오르다 보니 얼마 가지 않아서 걷기 쉬운 길을 마주한다.

4.19 묘역

그 길에 4.19전망대가 있다. 그곳에서 4.19민주묘역을 바라본다. 헤아릴 수 없이 무수히 많은 꽃다운 청년들의 묘지들이 보인다. 과연 저들은 누구를 위한 희생이었나? 오로지 자신의 권력만을 위해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하고 사사오입 개헌까지 서슴지 않았던 독재정권에 맞서 과감히 자신의 목숨을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영령들에게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저분들의 미래인 현재를 사는 우리의 정치인은 과연 숭고한 뜻을 받들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강재 신숙의 묘

길을 가다보면 강재 신숙 선생의 묘소도 보인다. 신숙 선생은 경기도 가평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독립선언서를 교정 및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임시정부를 만드는데 관여했고 활동을 지원했다.

단주 유림의 묘

단주 유림선생의 묘도 있다. 단주 유림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은 안동 임동면 장터에 만세시위를 주도했으며, 이후 만주로 건너가 남만주 독립군 단체 인 서로군정서에 가담해 항일독립투쟁을 벌였다.

나의 이상은 강제권력을 배격하고 전민족, 나아가서는 전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하에서 다같이 노동하고 자유롭게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 -유림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의지대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은 하나의 이데오르기, 하나의 종교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치가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단주 유림의 꿈의 실현은 언제나 달성 가능할 것일까?

섶다리

섶다리다. 섶다리는 통나무, 소나무 가지, 진흙으로 놓여진, 임시다리를 말한다. 강을 사이에 둔 마을 주민들의 왕래를 위해 겨울 초입에 놓았다가 여름철 불어난 물에 떠내려 갈 때까지 사용한다. 내가 어렸을 때 마을에도 저런 섶다리가 있었다. 여름철 거센 물살에 다리가 떠내려가면 동네 형들이 업어서 개울을 건네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묘

일제 때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묘소다. 이시영은 대한제국의 관료로서 17세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해 외교부 교섭국장, 한성재판소 소장, 평안남도 관찰사를 거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1910년 국권이 빼앗기자 이시영은 형제와 가족 40명과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중국에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청산리전투를 승리를 이끄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였고 해방이 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지켰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이 되었지만 1951년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의하여 '국민에게 고함'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광복군 합동묘소

2단으로 높게 쌓아 올린 이시영 초대 부통령 묘소 왼쪽, 보이지 않은 곳에 작은 봉분이 있다.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1940년 ~ 1945년 사이에 중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하거나 순국한 애국선열 17위의 합동묘소다. 그분들의 묘는 초라할 지라도 동양의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해 목숨을 다한 그들의 뜻은 그지없이 거룩하다.

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진주 우리나라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탕에서 헤매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가자 고향에 어서가자. 조국에.
- 압록강 행진곡 중에서

이준 열사의 묘

북한산둘레길 순례길 구간 마지막에 이준 열사 묘소가 있다.

이준은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 활동 중 순국한 인물이다. 국제정세를 모르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내부의 문제를 외세의 힘을 빌어 해결하려다가 일본에 강제 병합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때마침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전덕기, 이동휘, 이회영 등은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고종에게도 신임장을 받아 특사로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이준이 정해졌다. 이준은 고종의 신임장을 들고 만주의 이상 용정 러시아의 이위종과 차례로 합류하여 헤이그로 향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에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영일 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회의장에도 들어가지도 못한 체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 크게 낙담한 이준은 큰 병을 얻어 앓다가 바겐슈트라트에 있는 호텔에서 순국하였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하고 하는 일은 하고 하고 또 하여야 한다. 하고 하고 또 하다가 후인이 다시 하여야 한다.
- 이준 열사


이준 열사의 묘소의 방문을 끝으로 북한산둘레길 2코스 순례길 구간을 마쳤다. 순례길 구간의 수많은 묘소들의 묻힌 사람들, 그리고 여기에 묻히지 않은 수많은 무명의 사람들이 세계와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위하여, 또는 자신의 억지 주장을 위하여 자연을 파괴하고 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제압하려 한다. 우리 후손이 살아갈 이 땅이 마치 영원히 자신들이 소유할 것처럼. 이제 우리는 그들과 달라야 한다.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는 미래의 세대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