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둘레길

(55)
북한산둘레길 제13구간 송추마을길에서 고향의 정취를 느끼다 송추마을부터는 양주군이다. 양주의 땅을 처음 걸어본 때는 고등학교 1학년이다. 그 때 나는 파주에서 의정부로 통학을 했다. 항상 파주와 의정부를 메뚜기처럼 버스를 타고 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눈이 억수로 퍼부었던 날, 버스는 파주에서 양주로 넘어가는 쓰르레미 고개 중턱에서 더 이상 가지를 못하고 멈춰버렸다. 우리는 모두 버스에서 내려 의정부에 위치한 학교까지 양주의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장장 여섯 시간의 폭설이 내리는 눈길을 걸어 점심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에 학교에 도착했다. 담임 선생은 몽둥이로 우리의 엉덩이를 장난스럽게 툭툭 치며 빨리 좀 다니라고 하고 우리는 태연하게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 날은 천재지변이라 학교에서 지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양주라는 지명을 보니 그 날의 기억이 불현듯 떠..
북한산둘레길 제12구간 충의길에서 충의 의미를 되새기다 가운데 中, 마음心의 뜻을 가진 충(忠)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조금의 속임이나 허식 없이 자기의 온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조선시대에는 오직 국가와 임금을 위하여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을 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忠의 의미는 변함없는 것 같다. 각국의 통치권자는 인류의 평화와 행복은 뒷전이고 오직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최고의 충신이고 영웅으로 생각한다. 21세기의 忠과 義의 뜻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북한산둘레길 제 12구간 충의길이다. 충의길의 처음은 사기막골에서 시작한다. 사기막골이란 지명은 예전에 이곳에서 사기그릇을 굽던 막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사기막골의 사기막교를 건너 오늘의 여정은 시작된다. 사기막 ..
북한산둘레길 제11구간 효자길에서 조선의 효의 의미를 보다 유교의 중요한 덕목은 충과 효다. 유교에서는 사회나 국가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충과 효가 근원이다. 그 중에서도 효는 유교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자식은 어떠한 경우라도 부모의 뜻을 따라야 한다. 효는 부모가 살아있어서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섬겨야 한다. 유교사회인 조선시대에서는 부모가 죽으면 탈상을 할 때까지 3년 동안 묘소 근처에 움집을 짓고 시묘살이를 해야 비로소 효자가 된다. 효자 박태성과 호랑이의 전설이 깃들여 있는 효자동에 위치한 북한산둘레길 제 11구이다. 조선시대 한양에 박태성이란 효자가 살았다. 그는 매일매일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소를 다녔다. 그 효성에 호랑이도 감복하여 어느 날 호랑이는 박태성을 등에 태우고 묘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뒤 40년간 한결같이 박태성을 태워주었는데 나이가 들..
북한산둘레길 제10구간 내시묘역길에서 내시의 삶을 생각하다 조선 내시의 삶은 비참했다. 태어나자마자 거세를 당하고 평생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더구나 조선초기의 내시들은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남성의 상징까지 잘라버려서 거세중의 대다수가 살아남지 못하고 죽었다. 그 중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은 서서 소변을 보지도 못했고 소변조절이 안되어 언제나 속옷이 축축하게 젖은 상태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나중에 고환부분만 없애도 자손을 번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그런 희생은 계속되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잠들어있는 국내 최대의 내시묘역이 있는 북한산둘레길 제 10구간 내시묘역길을 간다. 예전의 내시묘역길은 이 길이 아니었다. 2020년 7월부터 둘레길 중 사유지를 원래의 주인한테 반..
북한산둘레길 제9구간 마실길에 마실을 가다 '마실’은 이웃에 놀러 간다는 뜻이다. 시골에서의 삶은 이웃에 놀러 가서 함께 웃고 떠들며 어울리는 맛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도시인들은 마실의 즐거움이 없다. 시골 동네에 마실 나온 기분으로 북한산둘레길 제 9구간 마실길을 간다. 마실길 초입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 화의군 이영의 묘역이 있다. 그는 1455년 세조 1년에 단종의 복위사건으로 연류되어 전라도 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마실길로 접어들기 전에 큰 대로를 지난다. 대로주변에 한옥집과 단풍, 대나무가 어우러져 아름답다. 진관사 입구에 커다란 태극기 사진이 있다. 진관사 칠성각 해체 복원 불사중에 독립신문을 비롯한 신문 6종 20점이 태극기 안에 싸인 채로 발견되었다. 이 유물은 중국과 국내의 항일 독립운동에 실제 사용된 것으로 진관사가 당..
북한산둘레길 제8구간 구름정원길에서 구름 위를 걷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인간이 생활하는 공간도 역시 자연이다. 도시인들은 꿈을 꾼다. 작은 뜰과 연못, 동산이 있으며 작은 연못 속에는 물고기들이 노는 넓은 정원이 있고 큰 유리창 밖으로 병풍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그런 집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정작 그런 집에 살다 보면 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통 유리창을 수시로 닦아야 하고, 매일매일 정원의 잡초를 제거해야 하고, 평생 동안 똑같은 풍경에 질리기도 한다. 하지만 작은 집에 살면서 여행이란 취미를 가지면 온 세상이 내 집이고 온 세상이 정원 그 자체다. 특히 산길을 여행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평생에 기억할만한 멋진 풍경을 접하기도 한다, 오늘은 숲 위에 놓여있는 구름다리를 따라 탁 트인 도시풍경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북한산둘레길 제 ..
북한산둘레길 제7구간 옛성길의 가을 빛 성종의 장남으로 태어난 연산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폭군이었다. 여린 성격의 연산은 자신의 친모가 사약을 받아 죽게 된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 폭군이 되었다. 생모의 폐비를 찬성했던 신하들을 살해하고 아비의 후궁을 제 손으로 죽여 산야에 버리고, 조모를 때려서 죽이고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의 무덤을 파헤쳐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었다. 또한 성균관의 학생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유흥과 향락으로 국고를 탕진했다. 북한산둘레길에도 그 연산군의 폭정의 흔적이 남아있다. 북한산둘레길 제7구간 옛성길을 간다. 이 길은 둘레길 중 유일하게 성문을 통과하는 구간이다. 이곳은 대남문과 비봉능선에서 이어져 내려와 조선시대의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여 축성된 탕춘대성의 암문이다. 암문이 있는 이 일대를..
북한산둘레길 제6구간 평창마을길 속 그림같은 집 조선시대에는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나라에 공물로 바쳐야 했다. 홍수나 가뭄으로 생산을 하지 못해도 반드시 그 지방의 특산물로 바쳐야만 했다. 더구나 돈에 눈이 먼 관리나 상인이 대신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고 그 대가를 백성에게 몇 배씩 특산물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이런 폐단을 방지하기 위하여 광해군은 경기도에 한하여 특산물을 쌀로 대신하여 납부하도록 명하고 중앙에 선혜청과 지방에 대동청을 두고 관장하게 하였다. 평창마을은 광해군 때 선혜청 중에서 가장 큰 창고인 평창이 있던 곳이다. 이번에 가는 북한산둘레길 6구간은 평창마을길로 마을을 통과하여 가는 길이다. 평창동은 광혜군 때 시행했던 대동법에 의해 거두어들인 쌀을 보관하던 평창이란 창고가 있던 곳이다. 선혜청이 있던 자리로서 재물이 모이는 땅이었다..